생명수호 동영상 공모전

<언플랜드>와 함께 하는 제5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우수상 :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울타리로의 초대

관리자 | 2020.10.07 11:30 | 조회 1428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울타리로의 초대

주한경 마리아(당산동)


삶이 우리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변화를 강요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종종 실패라고 여긴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러한 변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 자신의 재능, 능력, 용기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인생이라는 쇼가 더 이상 내 스스로의 지휘하에 있지 않다는 좌절감, 더불어 내가 굳게 믿고 있는 선의의 개념과 그토록 갈망하던 가치들은 부모와 사회의 기대 역할의 압력 아래 아무 생각없이 쌓아온 거짓된 자아의 신념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쳤고, 그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은 거대한 지진이 되어 내 삶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집안에 뜻밖의 좋지 않은 사고가 겹치면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너무나 없다는 무력감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위태로운 고독의 시간을 버텨야 했던 나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묵묵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기세등등하게 나만의 삶을 살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냉담하던 나는, 결국 패전한 장수처럼 맥없이 비실대며 한량없이 너그러우신 하느님 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기나긴 냉담을 깨고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러 간 어느 일요일, 어색하게 성당에 앉아 주보를 뒤적이다 우연히 보게 된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 소식에, 폐허가 된 황무지 같던 나의 마음에 신비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이 바뀔 때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깊숙히 숨어있던 제철의 생명들을 깨우듯, 새로운 의욕이 제 계절을 찾은 동물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만나게 된 책 언플랜드속의 주인공 에비는 어느 면에서 나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스스로의 가치가 아닌 한쪽으로 치우친 보편적 이념에 휘둘린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절박하게 고뇌하는 그녀의 모습 위에 내 모습이 겹쳐졌고, 나는 위로 받았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아 스스로의 모습으로 충만하게 살게 된 그녀의 해피 엔딩에서, 나 역시 올바른 길로 들어섰구나라는 안도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에비를 통해 내가 그간 의심없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 중 하나였던 여성의 자기 결정권 수호와 낙태 합법화에 대해, 묵직한 울림으로 질문을 던지고 계셨다. “왜 스스로의 진실을 찾아 보지 않느냐?”

나는 유아세례를 받은 오랜 천주교 신자였지만, 낙태 합법화에 있어서는 지지의 입장에 서있었다. 그간 이 사안은 내게 묻고 따질 이유가 없는 문제였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형성되어 있는 불합리와 불공평을 나름대로 눈치껏 잘 대처해 나가며,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모습으로 자리잡는 동안, 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해 앞장서는 여성의 본보기이자 대변인이 되었고, 또한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성공한 사회 선배로서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모습들은 페미니즘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게 있어 낙태 합법화는 당연하게 지지되어야 하는 신념이었다. 하지만, ‘언플랜드를 읽는 동안 나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사실은 내가 단 한 번도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는 쪽의 논리를 귀담아 듣고,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이 실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쪽의 쟁점과 논쟁을 신중히 생각해보고 싶어진 나는, 두 진영의 논점이 실린 글들을 모두 찾아 찬찬히 비교하며 읽어 보았다. 그리고 주변 여성들에게 그녀들의 생각과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들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대부분 낙태 합법화를 지지한다 말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낙태 합법화는 여성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 존중을 위해서 당연히 보장되어야하는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 누군가가 왜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태아의 생명권 수호때문이라는 아주 원론적이고 평면적인 수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20대 중후반의 친구들 중 상당수가 내가 묻기 전까지 낙태가 불법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낙태 수술이 아예 불법이 되거나 현행처럼 제한된 상황에 한해서만 허용되는 경우, 청소년 임신이나 별거 또는 이혼 소송 상태에서 법적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발견한 경우 등의 대처에 한계가 있을 것임을 우려했다. 어떤 친구는 태아의 건강이나 성폭력, 근친상간, 사회 경제적 곤란함 등의 위험을 증명하고 허락 받은 후에 낙태 수술은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이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합법화하고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맞다는 강경한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무정하고 잔혹한 우리의 실상은, 낙태가 우리가 우려하는 위기에 놓인 여성들을 구하는 정의로운 목적으로 그다지 많이 시술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의 낙태 선택은 한국의 낙태 통계에서 현저히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낙태 수술은 남녀 간의 부주의한 성관계로 인해 생겨난 문제(로 여겨지는 생명)’을 제거하기 위해 선택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이에 더해, 낙태 수술이 가지는 높은 위험성과 후유증에 대해서 다들 어렴풋하게만 인지하고 있거나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낙태 수술 자체가 음성적이고 부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보니, 낙태 수술과 후유증에 대해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까 모두들 말을 아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보니 낙태 수술에 대해 여성들이 서로 나누어야만 하는 진실과 진짜 정보는 더욱 더 음지로 음지로 꽁꽁 숨어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낙태 합법화가 오히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더욱 고착시키고 남성이 더 쉽사리 상황을 모면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기에, 궁극적으로 여성에게 더욱 불리할 수도 있음이 널리 인지되고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애석했다. 이러한 부분은 책 언플랜드속 에비와 남자친구 마크와의 관계에서도 매우 잘 나타났다. 에비는 첫 남편이었던 마크와의 관계에서 두 번의 임신 중절을 한다. 스무 살 초반의 에비가 처음으로 임신을 하였을 때, 그녀가 그토록 쉽게 낙태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 친구였던 마크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낙태를 권하고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낙태가 두 사람이 합의 하에 자행되는 유아 살인과 다름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현재의 남편, 더그와 달리, 마크는 그러한 인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에 에비의 낙태 수술에 대해 태연하고 태평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마크의 태도에서, 그와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에비가 두 번째 낙태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보였다. 만약 전 부인 소생의 아이가 이미 하나 있어 더 이상의 아이를 명백히 원치 않았던 마크가 낙태는 끔찍한 살인 행위이고, 여성이 일생동안 절대 경험하게 해서는 안되는 매우 위험한 수술이라는 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애초부터 원치 않는 임신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책임감 있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스무 살의 에비가 낙태를 통해 쉽게 상황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마크의 졸렬함에 분노하고, 수술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태연자약함이 그녀가 그에게서 진정으로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의 방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그리고 죄없는 생명을 죽게 만들고 동시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될 수술의 선택의 기로 위에 스스로를 놓이게 한 자신의 경솔함을 통렬히 반성한 후에 비로소 낙태 수술을 받는 결정에 이르게 되었더라면, 다음의 상황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낙태가 합법화되고 평범한 의료시술로 취급됨으로써 여성들이 자기 결정권을 구애없이 누릴 수 있다는 진보의 이면에, 궁극적으로 남성의 무책임을 방조하고, 죄책감을 빠르게 망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여성의 몸과 생명의 죽음에 대한 남성의 무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오싹한 불리함이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거침없이 낙태 합법화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변의 여성들과 대화를 거듭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울타리 양쪽에 존재하는 옳음과 다름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채 또는 다른 대안들을 고민해본 적도 없이 울타리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서 있는 것처럼 여겨져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는 그간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최대한 전하려 애썼다. 일부를 전부로 알고 믿은 진실에 우리 모두가 배반당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샌가 낙태 합법화 반대의 논점과 쟁점, 그리고 생명 수호의 열심한 전파자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하게 된 선배 H언니로부터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먼저 듣고 있던 H언니는 뜻밖에도 자신의 낙태 경험을 털어놓았다. 늘 매사에 올바름을 지향하고 깔끔하게 대처하지만, 인정과 의리가 있어 좋아하던 언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잠깐의 쇼크였지만, 나와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눈 그녀들 중 누군가는 내게 말하지 않았을 비밀이 있으리라 짐작한 적도 있었기에, H언니의 솔직한 고백은 오히려 더 진정성있게 다가왔다.

마리아, 네 얘기가 참 다 맞아. 둘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복용한 약 중에 태아에게 해가 되는 약이 있었던 거야. 좀더 조심을 했어야 했는데첫째 아이의 병원 뒷바라지도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기도 해서, 고민 끝에 남편과 낙태를 결정했어. 나 정말이지 천번 만번을 고민을 하다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의 태도가 너무 충격적이었어. 이게 뭐랄까그냥 맹장이나 물혹을 떼어내어야 하는 환자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라고나 할까. 나는 내게 점지된 생명을 죽게 만드는 이 상황이 너무 괴로워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의사가 보이는 기계적이고 무감각한 반응이 너무 기가 차더라. 물론, 나 말고 복잡한 사연을 가진 환자들을 워낙 많이 만나왔을테니 그럴 수 있겠다 이해는 하지만, 이게 정말 그렇게 쉽게 결정되어서는 안돼는 문제잖아. 그런데 수술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흘러가고, 이렇게까지나 간단하고 쉽게 끝나는 건 내가 겪으면서도 정말 아니다 싶더라. 그리고, 이 수술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생각보다 후유증이 커. 난 첫째 아이 출산 때보다 몸상태가 훨씬 더 안좋았어. 한의원을 다니며 몸을 추스렸어야 했는데, 한의사가 그러더라. 낙태 수술이 덜익은 밤송이에서 밤을 억지로 잡아 뜯어내는 것과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는 거야. 그러니 자궁에 얼마나 크고 깊은 상처가 남아 있겠어. 몸 속에 있어서 안보이니깐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것뿐이지…… 그리고 죄책감. 이 감정적 괴로움이 정말 엄청나게 크고 길게 가. 이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하는 감정인 것 같아. 낙태에 대해서 모두들 쉬쉬하니깐, 이런 실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여성들이 잘 알지 못하는 거 정말 문제지…… 어쩌면 낙태 합법화는 막을 수 없는 세계적, 사회적 흐름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 다음이 진짜 문제가 되는 거야. 낙태를 쉽게 결정하는 문화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고, 어떻게 해서든 그런 문화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인류는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어떻게 보면 이게 죽여도 되는 생명을 인간이 의지로 정할 수 있다는 개념에의 또 하나의 신호탄이 되는 일이거든. 세상에 죽여도 없애도 되는 생명은 없는 게 맞지. 게다가 죄도 없는 생명인데. 인간의 생사는 신의 영역으로 두어야할 일인데, 그걸 태생 자체가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대혼란이 오지 않겠어? 힘이 없는 생명체에 대한 죽음을 인간의 의지로 결정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꺼야.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소한 태아지만, 다음은 누구에게로 그 칼끝이 향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깐…… 그게 정말 무서운 거지. 낙태 합법화가 죽음의 문화를 밑그림이라는 말이 바로 그 얘기인거야. 난 가톨릭 교회에서 펄펄 뛰는 거 이해해. “

어설픈 묻지마 낙태지지자에서 나름의 이유 있는 낙태반대론자로의 나의 전향에 제동을 거는 장애물들은 여전히 많다.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결정을 감히 내릴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우리가 과연 제공하고 있느냐는 야무진 후배의 날선 반문 앞에서는 대응 꺼리가 마땅치 않아 쪼그라든다. 예기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갈등 상황이 나에게 또는 지인에게 발생하게 되었을 때, 책 속 에비처럼 당당하게 제시할 만한 대안이 있나 찾아보지만 한국에 존재하는 대안들은 미국에 비해 몹시 빈약하고, 이마저 크게 매력적이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생명 수호의 기적같은 체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낙태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 속에서 나 같은 미혼 여성이 간접적으로라도 그러한 체험을 할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당장의 대안이 없고 현재의 사회적,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하다는 것을 이유로, 낙태가 여성을 위한 합당한 대안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에는 분투하고 싶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더 이상 나아질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장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낙태에 대해 주변 남성들과의 담론을 시작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한국에서 여성이 여성에게 낙태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깨어있고 진보적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충분히 여겨질 수 있으니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쉬웠지만, 남자들에게는 유별나고 드센 여자라 여겨질까 두려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나의 비겁함부터 먼저 직시해야겠다. 법률의 정교화와 사회 제도적 뒷받침의 개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낙태는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이 스스로 결정하는 양심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마주보며 낙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단단히 연대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일이건만, 우리는 서로의 눈조차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남성들을 낙태 이슈에 있어 더이상 수동적 관찰자로만 남아 있지 않게 할 수 있도록, 지금, 여성들이 먼저 서로를 끌어안을 부드러운 용기를 내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다.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울타리로 나를 초대하셨고, 차갑고 생명이 없던 울타리 안에 서 있었을 때보다, 나의 마음에는 기쁨과 따스함이 넘치고 있다는 그 느낌은 나날이 또렷하다. 생명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많은 보통의 선한 사람들을 이 기쁨의 울타리 속으로 확신을 가지고 불러들이고 초대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까지 나를 이끄신 것은 하느님 은총의 신비, 내 앞에 펼쳐질 하느님의 계획은 결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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