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제4회 생명수기 체험수기 우수상 '생명에 관한 이야기'(중)

관리자 | 2016.08.10 13:29 | 조회 228

제4회 생명수기 체험수기 우수상 '생명에 관한 이야기'(중)

 

 

김현희(아녜스, 미국 뉴저지 성백삼위한인본당)

 

 

 

 

절망의 늪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으려고 남편은 ESL학생으로 비자를 변경하고 학비가 싼 학교를 다니며, 아는 사람 소개로 파트타임으로 필라델피아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 공장의 회계를 봐주는 일을 다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오래 했던 여행사 일을 다시 하게 되었고, 아이는 보모와 남편이 반나절씩 맡아 돌보며 겨우겨우 생활을 하는 나쁠 것도 없는 날들을 지내며, 받을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누구도 쉽게 돈을 보내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두 어머니만 자신들 패물까지 팔아 우리에게 보내주곤 하셨습니다.

 

 오래도록 냉담을 하던 나와 무신론자였던 남편은 한인성당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온 탕자꼴로 실로 오랜만에 찾아간 성당에서 주일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다 부르지도 못하고 눈물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세례를 받고, 딸아이도 늦은 유아세례를 받으며 우리 가족은 하느님 밥상에 함께 둘러앉은 것처럼 평화로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씻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던 걸까요? 미국에는 일가친척도,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어서였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매달 쪼들리는 생활이 견디기 어려워 그랬는지 남편은 도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서성이다 보면 먼 하늘에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매달 모자라는 생활비를 축내 도박을 하느라 몇 달째 집세를 내지 못하던 겨울밤, 아이와 돌아온 아파트는 문을 열 수 없도록 잠겨 있었습니다. 잠깐 찾아갈 아는 이도 없는 뉴욕에서 1월의 겨울밤은 모질게 추웠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길가 공중전화에서 엄마에게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하고는 "여보세요…" 하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는 울음이 터져나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의 음성이 아득하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도박이라는 중독이 얼마만큼 엄청난 것인지 나는 이때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도망치듯 야반도주 이사를 몇 번이나 하고도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졌고, 두 번째 아파트에서 쫓겨나고는 결혼생활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집 거실에 일주일을 얹혀 지내면서 더 이상 뉴욕에서 남편과 이렇게 지낸다면 나는 자살을 할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부지, 저… 한국으로 돌아갈래요… 여기에 더 있으면 저… 나쁜 짓 할 것 같아요. 아이랑 돌아가고 싶어요. 비행기표 좀 보내 주세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않으시더니 자녀양도각서에 사인까지 받아들고 올테면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큰언니가 완강하게 나를 말렸습니다.

 "서울에서 그 사람이 너희에게 얼마나 최선을 다해 최상의 것을 주고 싶어했는지… 그거 생각해서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큰언니는 제부를 무척 믿고 아끼던 사람이었으며, 동생인 나보다 제부를 더 그리워했었습니다. 언니가 많이 힘들었을 때, 말없이 언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언니를 도와주던 제부를 언니는 정말 믿고 도와주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언니의 말 한마디가 짧았던 서울에서의 결혼생활이었지만 나와 딸아이에게 보여주었던 사랑과 평화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기억으로 다시 시작하겠다는 내 마음은 결코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비우기

 

 중국식당 2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우리는 많이 부서진 모습이지만 남편으로 아내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기쁨은커녕 불안에 슬퍼하는 나를 '하느님이 주신 성탄선물'이라며 위로하고 기뻐하던 남편은 직업도 불안정하고 넉넉하지도 않았지만 많이 안정된 듯 보였습니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대부분 모여 사는 뉴욕 퀸즈와 플러싱을 오가던 생활을 뉴저지로 옮겨 큰 아이를 입학시키고 작은 아이를 돌봐주러 시부모님이 오시고 우리는 열심히 직장을 나가고 평화로운 날들이 지속되었습니다. 둘째로 얻은 아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두 아이로 인해 부모님과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행복이라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도박은 직장을 옮기거나 어떤 불안정한 상황이 오면 심해져 긴축을 해야 하는 상황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상황이 길지 않으면 다행이었지만 도박이라는 불길한 그림자는 늘 우리 곁에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예쁘게 잘 자라주고 아무 것도 없던 미국생활에서 우리도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신용도 쌓고 남편이 고생한 덕에 영주권도 받고, 이제 정말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며 평일 레지오 마리애를 다니던 나는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073호][2010.06.20]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