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제1회 '생명수호 생명사랑' 체험수기 우수작 - 가장 큰 축복

관리자 | 2016.08.10 13:21 | 조회 250

가장 큰 축복



이회경(마르타, 대전 송촌본당)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볕이 참 따스하다. 저 따스한 봄볕의 입맞춤에 베란다 가득 오밀조밀 모여 있는 화초들은 누가먼저라 할 것 없이 한 껏 부풀어 봄을 알린다. 나는 이렇게 화창한날 베란다에 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가득 행복이 밀려온다. 나는 물만 주었을 뿐인데 내 관심만 주었을 뿐인데 어쩌면 저리도 예쁘게 자라 고운 잎 예쁜 꽃을 맺는 것 일까? 저들은 긴 세월을 우리아이들과 같이 자라난 화초들이다, 나의 한숨 소리를 들어 주었으며 힘을 준 또 다른 나의 자식들이다.

 

23년 전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하여 주위 어른들로부터 강한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원하는 것은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두려움이나 구김살 없던 청년기를 뒤로한 채 남편과 결혼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 이였을까?

30대초에 과부로 6남매의 가장이 되어 살아야 했으며 자녀를 넷이나 하늘나라에 먼져 보내야 했던 삶의 무게에 척추 뼈가 골절되어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니. 60의 나이에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생전 며느리 맞고파 외아들의 아내로 선택되었고 이제 나는 심씨가의 며느리 착하기만 한 남편의 아내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남편은 자영업자 였는데 그의 사업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1년도 안되어 첫딸을 낳은 직후 지하 월세 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일용할 양식에 허덕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기와 노모를 돌봐야하는 형편이라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남편의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못하고 분유를 먹여야 했는데 그것이 경제적인 큰 부담 이였고 쌀이 떨어지는 것은 다반사 였다. 
첫아이 백일 안에 난 또다시 임신이 되었고 그 반갑지 않은 임신에 내가 스스로 낙태는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는 듯 태중에 아기가 유산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자궁이 유착되어 임신이 불가능 했다. 그러나 내 사랑스런 딸을 형제 없이 외롭게 키우고 싶지 않았고 나는 외아들에 대를 이어야하는 사명을 가진 여인이 이었다. 유착 제거수술을 받았으나 임신을 해도 습관성으로 유산이 되는 허약한 모체였다. 마치 
“하느님이 주신 생명도 거부한 네가 어찌 아기를 달라고 하느냐.”
는 듯이 실패를 거듭하며 5년 만에 둘째 딸을 낳았다.

 

5식구가 되었으나 우리의 생활환경은 별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왜 그렇게 아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지 또 아들을 낳기를 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먹을 것 은 자기가 갖고 태어난다며 대를 이어주기를 원하시는 시어머니의 무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암울한 나날 속에서 임신과 자연유산이 반복 되던 중 10년 만에 내 배는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3째 아이를 출산하는 자는 야만인 이라고 하여 의료보험 혜택도 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저 여자 정신 나간사람 아니야? 지금 저 형편에 또 아기를 낳다니” 하고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유일한 희망은 하느님뿐이었다. 
“하느님 이제 제 안에 셋째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아들을 낳아 야 하니 아들을 주세요. 그러면 당 신의 뜻대로 잘 키우겠습니다. 그리 고 저희 여섯 식구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주세요.”
하고.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전세도 아닌 월세를 끼고 13평에 살고 있었으니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나의 기도는 터무니없는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 분의 기적이 필요했다. 어쩌면 협박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 저는 지금까지 당신 안에 서 예쁘게 잘 살았잖아요. 꼭 들어 주셔야 해요.”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 무렵 남편은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빚만을 안은 채 작은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다. 워낙 어려운 살림 . 알뜰함이 몸에 밴 나는 작은 수입이라도 월급을 받으니 살 것 같았다.이제 쌀이 떨어지는 일도 방세를 못내는 일도 없었다. 이듬해 부활절 전날 그렇게도 원하던 아들을 낳았는데 의사 선생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이 몸을 해가지고 아기를 낳다니! 앞으로 아기를 더 낳으려면 묘 자리 를 파놓고 낳으세요.” 하고 혼내셨다. 생각해보니 내 몸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나 보다. 그러나 우리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랐고 그 다음 해에 작으나마 융자를 끼고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여섯 식구, 24평 아파트. 3대가 살기에 다소 좁았으나, 욕심 없으면 행복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이다. 요즘 젊은이들 아이들 양육비 특히 교육비 부담 때문에 자녀를 못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아이들은 학원이나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도 잘 키웠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나로서는 사교육이 싫어서가 아니라 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만의 방법으로 교육을 시켜야 했다. 아이들을 자연에 데리고 나가 자연을 배우며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데리고 가서 책을 빌려와 독서와 일기쓰기를 습관화 했다..그 결과 아이들은 생각이 커져갔다. 학과는 문제집이나 교육방송으로 예습과 복습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별 어려움 없이 아이들이 제 몫 을 하며 잘 커갔다. 특히 발표력 문장력이 좋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 우리 큰 딸은 스스로 독학해서 서울에 명문대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다니는 둘째, 중학교 다니는 막내. 모두 사교육을 받지 않지만 상위권에서 별 어려움 없이 공부 잘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 모두 하느님의 사랑안에 예쁘고 자랑스럽게 잘 크리라 나는 믿는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교육은 필수요 만일 그 대열에 서지 않으면 부모입장에서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이들 사교육을 시켜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사교육을 받았다면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공부 할 줄 아는 자가 인생의 어떤 어려움에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수는 없지 않은가.


32평 아파트, 막내아들 에게는 남들에게는 거의 다 있는 방도 책상도 침대도 없는 것이 가슴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럼에도 항상 밝고 예쁘게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내겐 가장 큰 축복이리라. 
50살이 넘도록 건강한 몸으로 밝은 미소를 간직한 채 여섯 가족의 가장으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편에게도 감사한다. 바람이 불면 쓰러질듯 항상 휘청거리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20여년을 한결 같이 항상 기쁘게 사시는 시어머니. 대학교 3학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해서 돈 모아 스스로 호주 어학연수 떠난 우리 자랑스러운 큰딸 어느새 엄마보다 커다란 마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공주님이다. 고등학교2학년 한창 공부에 힘들어도 반도체공학을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늦은 밤까지 책과 씨름을 하며 착하고 여린 마음 간직한 채 예쁘게 커가는 둘째 딸. 중학교 1학년 욕심도 불만도 없이 세상 누구나 다 좋은 우리 막내 장래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언제나 든든하게 우리가족의 활력소가 되는 우리 아들.

이 험한 세상 한 지붕6가족 3대가 살아가며 어찌 바람이 불지 않겠나?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만 주소서 기도할 뿐 지난23년 되돌아보면 조금의 여유재산도 없이 그날그날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이 레일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긴장하며 그리고 봉사하며 살고 있다. 

"하느님, 저희에게 주신 십자가 잘 안고 기쁘게 살아 갈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저희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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