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제1회 '생명수호 생명사랑' 체험수기 우수작 - 그래, 넌 엄마 아들이야

관리자 | 2016.08.10 13:20 | 조회 258

그래, 넌 엄마 아들이야


이상희(사비나, 서울 방학동본당)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말과 짧은 입맞춤, 그와 동시에 고사리 같은 손은 엄마 배에 와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엄마 배를 만져보고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으로 뽀뽀를 날리며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짧은 이별의 아쉬움을 함께 보낸다.
 현관문을 닫고 주방 창가로 가 까치발로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 하루도 주님께 아이를 맡기는 화살기도를 드린다.


 1999년 무더운 여름이 시작 될 무렵, 매주 스쳐 지나치던 서울 주보 한 켠에서 '사랑의 부모'라는 글에 시선이 머물렀다. 며칠을 고민 끝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을 꺼냈다. 
 사랑의 부모는 아이가 입양 갈 때까지 아이의 가족이 되어주는 일이다. 남편은 반대했고 아이들은 동생이 생긴다는 말에 그냥 좋겠다고 했다. 
 난 나이를 더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은 나중에 원망 듣고 싶지 않다며 알아서 하라고 했고, 아이들 큰 고모는 입양을 생각하고 하라고 했다. 그 때 난 완강하게 부인했고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건강 검진을 받고 그 결과를 입양원으로 보내고 아이를 기다리던 중 생후 6개월 남자아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생후 6개월 이라는 말에 6개월 아기가 어떠했는지 아이들의 육아 일기장을 보았다. 
 눈에 띠는 것은 낯가림이었다.


 8월 끝 무렵에 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그 아이와 첫 만남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빨간 줄무늬 반팔 티셔츠에 남색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둘째와 너무 닮았다. 생일도, 몸무게도….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오는 길, 작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맑고 예쁜 큰 눈으로 무언가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아이에게 낯가림은 없었다.
 새로 시작하는 육아에 자신이 없었지만 많이 안아주고 사랑만 듬뿍 정말로 듬뿍 주라는 수녀님 말씀에 힘입어 아이와의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와의 생활은 모든 것을 아이의 시간에 맞춰야 해서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 미사는 내게 큰 힘이 됐다. 
 아이와의 만남에 감사하고 그 보다 이 귀한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어린 생모에게도 감사하며 아이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그 무렵 남편은 통신교리로 어렵게 세례를 받았다. 무뚝뚝한 남편, 아니 무관심에 가까운 남편이 귀가도 서둘러 했다. 쉬는 날이면 머리카락이 허연 사람이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아이로 인한 우리 가정의 큰 변화였다. 
 새벽이면 일어나 우는 아이, 배고픈 것도 기저귀도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손길을 뿌리치며 서럽게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잠자는 모습이 우리 모두를 아프게 했다. 그런 아이가 사랑스럽다 못해 가슴 저리게 했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나 아이의 돌 무렵, 다시 보내야 할 시간이 왔다. 
 '아이가 정말 좋은 가정으로 입양을 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보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나이 많은 부모이기에 아이들에게 커다란 짐을 주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당시 13살인 딸은 엄마 마음을 아는지 자신의 진정한 동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10살 아들은 그냥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에만 만족했는지 흔쾌히 승낙했다.
 친정어머니는 당신 딸이 힘들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허락 하셨다. 결혼 해 아이가 없어 고생할 때 입양을 생각하셨던 어머니시다. 
 그러나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이제 편안해 질 때인데, 남의 자식 키워봤자…' '제 자식이나 잘 키우지 형편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등 결정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주위 반응은 더 큰 벽으로 다가왔다.
 반대하신 분은 우리 가족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말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러나 내 맘에 더 걸린 것은 '좋은 부모님, 좀 더 여유로운 가정으로 갈 수 있는데 우리 욕심으로 아이 앞날을 막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 고민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또 아이가 사춘기를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지 온통 걱정에 또 걱정이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바라면서 자식을 키우지는 않기에 주님 안에서 사랑만 듬뿍 주면서 살아간다면 그 어떠한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선뜻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먼저일까? '그래, 아이를 생각하자'.
 아빠, 엄마라 부르며 활짝 웃는 아이에게 또 이별의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밤이면 울던 그 울음소리가 가슴에 남아 있었기에, 그것이 전부였다.


아이가 돌을 며칠 앞둔 때 유아 세례를 받고 우리는 정말 한 가족이 됐다.
 그러나 또 다른 벽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입양을 비밀로 하려면 이사를 가야하는 일이다. 
 그 때 누군가 이런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봐." 
 그래 모든 것을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그때 그때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소중한 일인지 생각하며 살아가자. 그렇게 언 9년,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동네 소아과에 갔을 때 혀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대학병원에 갔다. 
 그런데 만 3살 아이의 언어가 돌 수준이라며 언어 장애 진단을 내렸다.
 그래도 치료로 좋아질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치료 받으러 가는 길은 아이와의 데이트 시간이었다. 지하철역 이름 하나하나 외우면서 아이는 엄마와 함께하는 이 특별한 시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이는 지하철에서 내리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 같으면 엄마 손을 뿌리치고 이 구경 저 구경하며 갈 텐데…. 아이는 병원 올라가는 길 내내 내 손을 놓지 않다가 병원 2층 치료실 앞에 도착해서야 손을 놓고 이곳저곳 구경하며 익숙함에 안도 하는 듯이 또래 아이들처럼 뛰어 놀았다. 
 그렇게 언어 치료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6살에 내려진 진단은 사회성, 인지, 언어, 동작 모든 것이 평균 이하였다. 그래서 특수 교육적 개입이 요망된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에겐 너무 힘든 십자가였다.
 그러나 '치료하면 보통 아이들처럼'이라는 말 한 마디에 또 희망을 걸었다. 개별 인지 수업, 사회성 치료, 초등학교 입학 전 프로그램 등 치료를 받고 일반 학교에 입학해 그 힘든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지금 2학년, 아직 미술 치료 중이다. 새로운 환경에 두려움도 많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씩씩하고 평범한 아이로 자라고 있어 우리 가정에 큰 희망이 돼주고 있다.
 
 나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생모에게 꼭 전하고 싶다. 지금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주길…. 또한 아이 생모로 인해 감사해 하며 행복해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래서 매일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살아가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제발 건강하게 잘 지내서 훗날 아이가 생모를 찾았을 때 웃으면서 힘껏 안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디모테오!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엄마 배를 만질 때면 이 엄마는 가슴이 더욱 아프단다.
 그렇게도 좋을까?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 배앓이가 아니라 가슴앓이로 너를 낳아 안았기에 더욱 더 그런가 보다. 아들아! 걱정하지마 넌 엄마 아들이야. 공부 못해도 말썽꾸러기라도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원히 엄마 아들이란다.
 앞으로 너에게 그 어떠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너에게 생명을 준 생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 어떠한 역경과 고통이 온다 해도 엄마는 네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아주 가끔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 조금은 두렵다. 이 소중한 행복을 시샘하는 이가 있을까봐. 하지만 지금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너를 낳아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너를 낳아 준 생모에게 감사하고, 엄마 품에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해.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해.
 내 아들 디모테오야!


평화신문. 가정청소년
상- 2007. 7. 15 [929호] 
하- 2007. 7. 22 [9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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