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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생명수호 생명사랑' 체험수기 우수작 - 내가 널 지켜줄께, 사랑한다 아가야

관리자 | 2016.08.10 13:20 | 조회 275

내가 널 지켜줄께, 사랑한다 아가야



한광주(가타니라, 서울 창4동본당)

"혹시 기형아라도 잘 키울거야" 

'혹시 기형아를 낳을지라도 난 그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유난히 겁 많은 내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는 까닭이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믿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설마 건강치 못한 내게 그것도 마흔이 넘어 선물로 주시는데 건강한 아기를 주시지 않겠나 하는 작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두 아이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내가 70살까지 돈을 벌어야 막둥이 공부를 시키겠지"하며 남편은 기뻐했다. 둘째 딸도 드디어 자기 동생이 생긴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인 중2 큰 아들은 엄마가 늙어 주책이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난 그런 아들에게 만약에 네가 '엄마 저는 살아있어요. 저도 사랑 받고 싶어요. 저를 꼭 지켜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한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면 분명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서운한 마음을 대신했다.


 평소에 사소한 것에도 근검절약하며 살았던 우리 부부는 더 절약하며 살아야했다. 누군가 보건소에 가면 임산부에게 필요한 영양제와 기형아 검사 등 모든 것을 무료로 해준다는 말에 집에서 조금 먼 보건소를 기쁘게 다녔다. 임신 5개월 정도가 될 즈음 기초 기형아 검사를 해주며 만약 이상이 있으면 전화한다고 했다. 
 전화가 없어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공무원 출근 시간도 아닌 오전 8시쯤 전화벨이 울려 불안한 마음으로 받아보니 보건소 임산부 담당자였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딱딱한 어조로 "한광주님, 태아가 다운증후군과 일반 기형아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은데 어떻게 할거냐. 이래도 낳을 생각이냐"며 따지듯 내게 되물었다. 
 순간 난 너무 무섭고 기분이 불쾌했다. "내 뱃 속에 있는 아기를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냐"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화를 받기 전엔 잠잠했던 태아가 보건소 담당자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불안에 떨며 마구 발길질을 하며 요동을 쳤다. 난 따뜻한 손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며 태아에게 말했다. 
 "아가야. 걱정하지 마. 엄마는 네가 혹시 기형아라도 낳아서 잘 키울거야.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그러자 정말 기적처럼 그렇게 쉴 새없이 불안의 발길질을 하던 아기가 잠잠해졌다. 그 후부터 나는 더욱 더 태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성경을 읽고 쓰며 기도하는 것으로 태교를 열심히 했다.


 그래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에서 임신 중에 약을 복용하거나 산모가 나이가 많으면 기형아를 낳을 확률이 아주 높다는 보도나 기사를 보면 작은 믿음이 흔들려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늘 묵주를 들고 기도했다. 내겐 성모님과 예수님 '백'이 있으니 아무 걱정없다고 큰소리를 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애써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을 즈음 큰 아이가 준비물을 집에 두고 가서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들의 눈빛이 엄마의 임신 사실을 부끄러워 하는 듯 해 난 교실 벽에 붙어 불룩한 배를 최대한 작게 보이려고 숨도 멈추고 준비물을 전해준 뒤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죄지은 듯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 무겁던지…. 
 난 체구가 작으면서 아이를 크게 낳는 편이라 일찍부터 자궁이 내려앉아 조산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거의 누워서 지냈고, 변비가 심해 2시간 이상을 화장실에 있는 날이 많아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의 그런 눈빛을 보니 내 자신이 너무 측은했다. 


가족 사랑과 주님 은총 덕분에 

그날 저녁 난 끝내 아들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야, 이 나쁜 녀석아. 엄마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더 아름답게 살라고 주신 선물인 네 동생을 태어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아기가 너는 불쌍하지도 않냐?" 아들은 자기 생각이 부족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 후 아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임신 7개월 쯤, 출산할 병원을 알아보려고 집근처 큰 병원에 갔더니 산모가 나이도 많고 둘째를 낳은 지 8년 만이라 자연분만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다. 담당의사에게 혹시라도 내 아이가 기형아일지라도 낳을 것이고, 두 아이를 순산했기에 셋째도 순산할 수 있다고 믿으니 양수검사와 제왕절개를 거부한다고 말씀드리자 환하게 웃으시며 참 멋있는 산모라며 악수를 청하셨다. 
 임신 8개월부터는 온몸이 퉁퉁 붓고 당뇨가 나오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느라 두 시간 이상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세 아이에게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죽을 힘을 다했다. 결국 난 해냈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싸우면서 수학 사설 강사로, 또 두 아이와 뱃속의 셋째까지 키우면서 몇 년동안 공부하던 중어중문학 학위까지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내 모습을 하느님께서 예쁘게 보셨는지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을 보여주셨다. 둘째 딸이 하루도 쉬지않고 기도해준대로 진통한 지 30분 만에 3.2kg의 건강한 셋째 딸을 낳았다.


 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기가 첫 울음을 응애 하지 않고 똑떨어지게 "엄마"라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분만실에 함께 있던 의사, 간호사에게 우리 아기가 엄마라고 했는데 들었냐고 되물었더니 모두 들었다며 혹시 천재일지 모르니 잘 키우라는 담당의사의 말에 모두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난 "엄마"라는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동안 혹시 우리 아기가 의사들의 말처럼 다운증후군이나 기형아면 어쩌나 하고 가슴 졸였던 불안감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30분 만에 순산하고 악소리 한 번 안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며 출산한 산모는 처음이라며 많은 분들이 놀라워하셨다.


 비록 늦은 나이에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늦둥이를 키우느라 몸은 고단하나 마음만은 늘 천국이다. 두 아이도 했을 평범한 행동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셋째를 키우며 더욱 더 자상해진 남편은 늦둥이를 키워보니 이제야 '아버지'가 어떤 것이라는 걸 조금은 알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늦둥이를 키우며 변화한 것 중 가장 큰 것은 "괜찮아"라는 말을 참 많이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괜찮아!' 용서와 너그러움에 여유가 배어있는 말이다. 또 매사에 감사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친구들은 갱년기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데 난 요즘 젖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막둥이 덕분에 세월을 잊고 산다. 
 내 아이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나를 잡으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난 대통령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 부부에게 '부모'라는 이름표를 달게 해 준 세 아이에게 감사한다. 만삭의 몸으로 중어중문학 학위를 받고 건강한 아기를 순산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자기 몸보다 더 사랑해주는 가족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막내에게 약속한다. "내가 널 지켜줄게. 사랑한다 아가야." 임신사실을 알고부터 지금까지 내가 늘 셋째에게 다짐하듯 되뇌이는 약속이다. 


평화신문. 가정청소년
상-2007. 6. 10 [924호]
하-2007. 6. 17 [9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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