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결코 존엄사가 아닙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국 가톨릭 교회의 큰 별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향년 87세, 노환으로 선종하였으며,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자비로우신 하느님 품에 안기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임종을 맞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선종을 두고 사회 일각에서는 “존엄사를 선택했다.”, “인공호흡기만 떼내는 전형적인 존엄사다.”, “추기경의 죽음이 존엄사법 제정에 힘을 싣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김 추기경의 죽음까지도 일부 집단의 주장과 이익에 악용당하고 있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조로 김 추기경의 죽음을 왜곡하고 욕되게 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결코 존엄사가 아닙니다. 김 추기경은 노환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겸손하게 순응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삶을 온전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손에 맡기면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물론 기계적인 장치를 통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지 않았고, 시도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까지도 실존적 삶의 한 부분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죽음을 추기경이 직접 선택하였다는 논조로 오해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결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존엄사로 왜곡하여 집단의 이익을 주장하고, 나아가 반생명문화의 표본인 안락사까지도 슬그머니 끼워 넣는 식으로 존엄사법 입법 추진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깊이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오리건 주에서는 이미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존엄사법’(1997년)이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고, 워싱턴 주에서는 조력 자살까지도 허용되는 ‘존엄사법’(2009년)이 막 발효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존엄사법 입법 움직임에도 이러한 안락사 허용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존엄사법 입법에 대한 움직임에 심각한 우려와 함께 법제정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란 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아들이면서 편안히 눈을 감는 것입니다. 곧 인간 삶의 여정에서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의 과정이 자연적이어야 하는 것이 인간 존엄성의 매우 큰 영역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의 존엄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자연적 죽음의 순간에, 법률적 잣대로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만든 법률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 죽음이 크게 훼손되고, 인간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위험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임종의 시기에, 자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과 가까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삶과 죽음, 모두를 주관하시는 생명의 하느님께 우리의 믿음을 두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한다”(신명 32,39).
2009년 3월 19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