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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기름유출 100일, 태안은 지금

관리자 | 2008.12.15 22:27 | 조회 4292

 

 


사진설명
▶기름유출사고 직후인 지난 해 12월 중순 사진. 태안군 소원면 앞바다 바위들이 기름을 뒤짚어 쓴 채 검게 변해 있다.
▶3월 초순의 태안 만리포해수욕장 전경. 사고 직후 온통 검게 물들었던 모래사장이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김충희(루치아)씨가 기름 범벅이 된 채 방치돼 있는 굴양식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석달만에 횟집 문을 연 한수남(바실라)씨. 횟집은 주말인데도 손님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하다.
▶기름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문구가 붙은 방제작업 차량.

[르포] 기름유출 100일, 태안은 지금
빼앗긴 생명터전에도 봄은 오는가


기름때는 벗겼지만 먹을거리 불신은 여전
북적이던 자원봉사자도 뜸해 지역민 ‘시름’

지난 해 12월. 서해안을 휩쓸었던 검은 재앙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청정해역 태안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채 죽어갔다. 평생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가슴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리고 100일.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칼바람 불던 태안 앞바다에서 이제 봄바람을 느낀다. 하지만 따뜻한 바람,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에 비해 마음은 가볍지 않다. 100일 만에 찾은 태안에는 아직 봄날이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아득했다.

만리포해수욕장

한산했다. 불과 두 달 전 자원봉사자와 군인들로 북적였던 해수욕장은 철시한 상가와 함께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방제복을 입은 서너 명의 주민들이 미처 씻어내지 못한 기름때를 찾아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백사장 속에 스며든 기름때를 퍼내기 위해 용쓰는 포크레인 소리만 귀를 울렸다.

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 횟집에서 한수남(바실라)씨를 만났다. 한씨는 석 달 만에 횟집 문을 열었다.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정부가 나눠준 생계비 몇 푼으로 견뎌왔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20여 개 어항 중 물을 들인 어항은 두 개뿐. 몇 안 되는 광어와 우럭, 멍게 등은 모두 남해산이다. 돈을 더 주고라도 남해산을 사올 수밖에 없다.

“고깃배도 나가지 않을 뿐더러 잡아와도 팔수가 없잖아요. 어쩔 수 없이 남해산을 가져오긴 했는데 이것도 제때 팔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적자운영이 될게 뻔하다. 그래도 문을 열 수 밖에 없다. 하릴없이 어항 속 물고기만 바라보는 한씨의 한숨이 깊어만 간다.

만리포 해변 20여 개 횟집 중 문을 연 곳은 10여 곳. 하지만 개점휴업 상태다. 기름피해와는 상관없는 남해산을 먹을거리로 내놓지만 막연한 불신감 때문인지 횟집을 찾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신두리 굴 양식장

검은 기름때에 엉겨 죽어 말라빠진 굴들은 100일 전과 다름없다.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기름때를 제거한 여느 해수욕장이나 해변 가와 달리 이곳 굴 양식장은 아직도 기름기가 가득하다. 보상 문제가 걸려 있어 방제작업이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험회사에서 피해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매달아 놨다는 빨강, 노랑의 리본이 온통 검은 양식장과 대비된다.

김충희(루치아)씨는 3년간 공들여 키운 굴을 수확하지도 못한 채 재앙을 만났다.

“어쩌지도 못한 채 이렇게 죽어 나자빠진 굴만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타지요. 보상은 언제 받을지 기약도 없어요. 우리야 자식새끼들 다 키워 그래도 괜찮지만 굴 따서 자식 키우던 사람들은 뭘 먹고 사냐고요.”

김씨의 남편 김강옥(니콜라오)씨는 방제작업에 나갔다. 방제작업으로 근근이 버는 하루 일당으로 생계를 이었는데 일당도 12월 치가 지급된 후 소식이 없다. 1, 2월 일당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방제활동이 곳곳에서 마무리되면서 부부가 함께 나가던 작업도 가구당 한명으로, 매일 있던 것도 사흘에 한번 꼴로 줄었다. 갯벌에서 바지락이나 낙지를 잡아 생계를 꾸리던 주민들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박광일(레미지오)씨는 벌써 며칠 째 집에서 쉬고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바지락이 있어도 팔 수가 없으니 잡으나 마나. 박씨처럼 맨손어업을 하던 사람들은 생계비도 턱없이 적게 받았다.

태안성당 기름재해 대책본부

토요일 오전, 태안성당 기름재해 대책본부는 분주했다. 석 달이 훌쩍 지났지만 주말에는 2천여 명에 가까운 봉사자들이 성당을 찾는다. 사고 직후부터 태안본당을 통해 방제작업에 나선 봉사자는 2만4천여 명에 달한다.

하지만 설과 개학시즌을 지나며 봉사자가 급격히 줄었다. 평일에는 100여 명, 어떤 날은 봉사자가 아예 없다. 석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닷바람과 싸우며 자원봉사자들을 안내하고 점심을 준비하느라 본당신자들의 체력도 바닥난 상태다. 비단 본당 신자들의 어깨를 쳐지게 만드는 것은 고된 일만이 아니다.

방제작업이 암을 유발하는 등 인체에 해롭다는 이야기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전해지자 봉사일정을 갑자기 취소하는 일이 많아졌다. 태안에 가면 마치 전염병이라도 옮는 것처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체념도 많이 했다고 한다.

“언론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요.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찾을 수 있도록 도왔지만 이제 이곳에 아무도 오지 않도록 만든 것도 언론이네요. 여름 내내 파리만 날리게 생겼어요.”

재해대책본부에서 만난 한 신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씁쓸하다. 기름유출 100일. 기름이 몰고 온 피해는 도미노처럼 태안 사람들 모두의 하루를 힘겹게 만들고 있다.

100만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은 예전의 흰 속살을 드러낸 백사장의 모습처럼 결실을 맺었지만 아직도 태안 사람들의 깊은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기름으로 얼룩졌던 겨울 태안에 따뜻한 봄날이 올 수 있도록 한 번 더 힘을 보탤 때다.

“아직도 여러분의 손길 필요합니다”

현재 기름피해지역의 방제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수온이 높아짐에 따라 바다 속 깊이 가라앉았던 기름이 떠올라 언제 해안가로 밀려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자원봉사자들을 봉사현장으로 안내하고 있는 김응렬(대건 안드레아)씨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기름 냄새도 심해지고 물이 들어올 때마다 기름도 해안가로 밀려들고 있다”며 “이런 상태라면 방제작업은 앞으로도 몇 달 더 지속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했다.

태안본당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카페(http://cafe.naver.com/taean1004)를 개설, 피해지역 현황과 봉사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안내하고 있다. 아울러 본당 사무실에서는 장기간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거나 M.T나 피정을 위해 단체별로 이 지역을 방문해 숙박하는 이들을 위해 민박이나 펜션 등 숙박업소와 음식점을 안내하고 있다. 태안지역 숙박업소나 음식점은 이번 기름유출사고로 벌써 석 달 넘게 손님을 받지 못하는 상태다. ※문의 041-674-1004 태안본당 사무실

이승환 기자 swingle@catholictimes.org
가톨릭 신문, 기사입력일 : 20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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