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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생명수호 생명사랑 체험 수기 대상 - 나의 딸 임마누엘라

관리자 | 2016.08.10 13:19 | 조회 1534

제1회 생명체험 수기 대상- 나의 딸 임마누엘라 "


한소영(가타리나, 서울 방학동본당)



오늘도 나는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 딸을 기다린다. 
 운동장 저 끝에서 딸의 모습이 보인다. 
 이 세상 어느 그림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떤 꽃이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아이는 내게 늘 꽃처럼 나비처럼 구름처럼 달려온다. 
 늘 하듯이 매일의 반복인데도 마치 한참 만에 나를 만난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뛰어온다. 
 그 아이에게는 매일 엄마와의 만남이 새로운 기쁨이고 시작이다. 
  
 우리 딸은 정신지체아동이다. 게다가 6년전부터는 척추측만증까지 생겨서 보조기까지 하고 있다. 난 매일 아침 딸아이 보조기를 채워주며 내 몸을 꽁꽁 동여 매는듯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내 가슴을 열어서 보일 수 있다면 아마 까맣게 재가 된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의사는 측만증 각도가 심하여 수술을 권하고 있는 상태이나 난 그 천사같은 아이에게 또 한번 아픔을 주기 싫어 그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 채 버티고 있는 것이다. 
  
 * *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1989년 5월 1일, 난 바라던 딸을 낳았다. 위로 아들이 있었고 시댁은 딸이 귀한 집이라 남편도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쪽 집에는 경사가 났고 우리는 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기쁨은 잠시였고 아이는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한 채 대학병원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황달이 심해서 머리에 주사를 꽂고 빛을 쪼이면서 치료하였다. 보름 후에 퇴원하였으나 여러 가지로 병약하였고 모든 것이 다른 아이보다 늦었다. 그때 난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도우미 아줌마에게 맡겼었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어서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말았다. 
  
 난 정말 꿈이 많은 여자였다. 여자치고는 야망이 있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늘 남보다 잘해야 했고 지기를 싫어하였다. 친정은 딸만 다섯이었는데 그 당시로는 부모님이 교육열이 높아서 딸 다섯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그 중 난 맏이였고 부모님은 아들 못지않게 키우려고 내게 공을 들였고 나도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성실히 열심히 살았다. 유복하고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 자랐고 명문대학을 나왔으며 그 당시로는 하늘에 별 따기인 외국인은행에 취직도 하였다. 대학시절 남편을 만났고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한 연애 끝에 선남선녀라는 남들의 찬사 속에 행복하게 인생의 첫 출발을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 내 앞에는 행복만이 존재할거라 믿었고 그 어느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남편도 능력있었고 무엇보다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결혼 2년 후 아들을 낳았고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것이 있다면 우리 아들을 낳은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잘난 아들이었다. 그런데 신은 너무 행복하면 무언가를 시기하는 것일까? 딸을 낳고나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 * * 

 의사가 말했다. 
 "따님께서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다른 아이보다 늦을 것이고 차차 자라면서 그 갭은 점점 커져서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상태가 심한데요. 목도 제대로 못 가누니까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현재로서는 별 방법이 없습니다. 하실 수 있는 방법은 먼 미래를 생각하며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현재만 생각하세요. 그래야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을거에요. 먼 미래까지 생각하면 힘드셔요. 오늘 이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만 생각하세요." 
  
 지금도 난 세브란스 풀밭에 앉아서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이와 둘이 앉아 바라보던 하늘 색깔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파란 하늘이었다. 가슴은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은데 뭐든지 제대로 돌아가는 것들은 다 뒤집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늘은 왜 그리 슬프도록 파란지…. 
 그냥 죽고 싶었다. 길을 가면서도 아무하고나 시비 붙고, 차가 내 옆을 지나가도 비킬 줄을 몰랐다. 그래! 다 죽는 거야! 죽어 버리는 거야! 내 딸은 엉망진창인데 나 혼자 멀쩡하면 뭘 해! 나 혼자 죽기는 억울해. 그래. 지구야! 뒤집어져라. 전쟁이 나든 예수님이 재림하셔 휴거가 되든 (그때 당시 휴거론이 떠들썩하여 지구 종말이 온다고 말세론이 등장하고 뒤숭숭하던 상황이었다). 그래, 다 함께 망가져라. 내 나이 서른둘에 이제 한창 좋을 나이에 장애자식과 살아야 할 내 인생이 참담하고 한심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죽어버리자. 
  
 딸 아이가 미웠다. 너무 미웠다. 이 애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친정 부모님은 누구 잘 키워줄 사람을 수소문 할 테니 너희들은 너희 인생을 살아라 하시며 가슴 아파하셨고 시댁 식구들은 우리 딸이 꽃밭에 불 질렀다며 속상해 하셨다. 그러나 원래 자기 앞에 차려놓은 밥상은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내가 품은 어떤 훌륭한 이상이나 꿈보다도 내 딸을 키우는 일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 난 장애아동의 부모들이 겪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겪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 * * 
  
 처음에는 딸아이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왜! 열심히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아왔는데. 왜! 그 다음에는 억울하고 딸 아이가 너무 미웠다.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고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고 세상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하느님도 원망스럽고 남편도 밉고 모두가 미웠다.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 난 임신인 줄 모르고 약을 먹었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산부인과에 갔었다. 의사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 뱉었다. 

 "날짜를 언제로 잡을까요? 없애야지. 재수 없으면 소화제를 먹어도 안 좋은데 드신 약은 태아에게 안 좋은 약이예요. 시간은 간호사와 잡으세요." 

 정말 너무 잔인하고 사무적인 말투가 내 귀에 거슬렸고 가톨릭 신자인 나는 망설이다가 신부님께 찾아갔다. 신부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설사 그 생명이 기형이거나 정상아가 아니라도 낳아야 한다고 하셨다. 신부님이 아는 신자 중에는 초음파 검사에서 지진아로 판명되었는데도 낳아서 잘 기르는 형제분도 계시다며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뺏을 수는 없다고 하셨다. 하느님은 생명이시며,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왔기에 존귀하고 소중하다고 하셨다. 나는 고민 끝에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또 그이와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태아에게 사랑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임신기간 내내 불안해서 손에서 묵주기도를 놓지 않았었다. 또 내심 별 일 없겠지 하는 불행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특유의 낙천적인 기대가 한 몫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 달 내내 꿈자리가 뒤숭숭하였고 묵주를 들고 그저 하느님께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우리 딸은 정신지체아였고 난 내 기도를 외면하신 하느님도 미웠고 내게 낳으라고 권한 신부님도 미웠다. 한밤중에 난 미친 사람처럼 사제관으로 달려가 왜 나더러 낳으라고 했냐고 하면서 신부님께 따졌고 신부님이 키워 줄 것이냐고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신부님도 당황하셨고 마음 아파하셨다. 그 신부님은 우리 성당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딸만 보면 늘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우리 딸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 처지를 비관하고 지내면서도 난 항상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유아세례를 주기로 했을 때 세례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수녀님께서 이 아이는 예수님이라고 하시며 '엠마누엘라'라고 짓자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엠마누엘이 우리 딸 에게는 정말 딱 맞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난 예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딸이 힘들게 하거나 아플 때 '아! 이 아이는 예수님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내가 해드리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어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입으로는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가장 즐겨 부르던 곡은 가톨릭 성가 41번 '형제에게 베푼 것'이었는데 이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딸을 키우면서 달라진 나의 변화 중 가장 큰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그 생명이 부족하거나 병약하면 마치 딸을 보는듯하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도 누군가 라일락 화분을 내다 버렸는데 그 생명이 너무 안쓰러워 가져다가 며칠을 물을 주고 키웠는데 자꾸 말라가서 우리 부부는 자고 일어나면 그것을 지켜보고 안타까워하였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은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 

 우리 딸은 재활치료가 필요한 아이였다. 세브란스에서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을 받았고 그 후로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통합교육과 병행하여 특수교육을 받고 있다. 처음 딸아이와 세브란스 재활병동에 입원했을 때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재활원이 없어졌으나 그때는 재활원이 있어서 상태가 심한 아이들은 시설처럼 그곳에 살면서 치료도 받고 하는 시스템이었다. 비용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입소하기도 어려웠고 대부분 어느 정도 가정형편이 좋은 아이들이 그곳에 온다. 난 일주일 정도를 딸아이와 입원해 있으면서 간단히 물리치료를 부모가 배우는 과정을 익히려 들어갔다. 그때 밤이면 모두가 잠든 재활병동을 혼자 걸어다니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우리 딸을 이런 시설에 맡기지만 않을 정도의 상태가 된다면 난 하느님께 감사하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이런 곳에 두고 집에 와서 목구멍에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딸을 데리고 살 수 있고 성당이든, 산이든 들이든 어디든지 데리고 다닐 수만 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내 마음을 아시고 지금껏 나와 같이 있게 해주셨다. 이제는 딸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 딸은 나의 신체의 일부처럼 하나가 되었고 난 우리 딸을 통해서 잃은 것도 많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많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겸손을 배웠다. 실패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딸아이를 통해 좌절을 경험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찼던 내 마음이 장애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 다 자식같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때는 내가 너무 비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굽신거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 내 자신을 돌아보면 슬며시 화가 나긴 한다. 

 우리나라의 통합교육이라는 것이 아직도 미비하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인 지금까지 통합을 시킨 나로써는 정말 어려움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요새는 그래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때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일일이 선생님들을 찾아가 이해시켜야했고 교육비는 우리 생활비의 반을 쓸 정도로 엄청나게 들어갔다. 정상 아이들이 1을 투자하면 10을 얻는다면 장애아동들은 100을 투자해도 1을 건질까 말까하니 그야말로 재정적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다. 그나마도 안하고 있으면 불안하고 걱정되니 엄마들은 하염없이 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었다. 화초에 물을 주면서 이 화초가 자라서 꽃을 피우겠지 하고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사람 마음인데 우리 장애아동의 엄마들은 이 꽃이 활짝 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저 변함없이 그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기분인 것이다. 
  
 * * * 
  
 딸아이는 이제 겉으로 보면 어엿한 아가씨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19살이니 얼마나 예쁜 나이인가? 그러나 육체에 걸맞게 인지도 나와 주어야 하는데 인지는 어린아이 수준이니 얼굴은 아기얼굴에 체격은 아가씨라 왠지 언밸런스한 것이 우리 아이들의 특징이다. 그래도 내게는 너무 예쁜 딸이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딸아이 또래 학생이 자기엄마랑 팔짱끼고 쇼핑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오손 도손 친구처럼 다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러움의 눈초리로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 그이와 연애시절 서로를 닮은 아이를 낳아 우리 나이가 되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늙어버린 자신들을 위로 받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난 그저 아들의 모습에서만 그 마음을 느낄 뿐이다. 
  
 이제 내 나이도 오십 줄에 들어섰다. 옛날 같으면 할머니 대접받을 나이인데 아직 난 늦둥이가 있는 엄마 기분이다. 친구들은 모두 갱년기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난 우울할 겨를이 없다. 아직도 딸아이를 등ㆍ하교 시키느라 바쁘고 하교 후에는 수영장, 재즈댄스, 언어치료 등으로 우리 딸 매니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바쁘게 감사하며 살고 있다. 
  
 우리 딸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선물은 아마 평생 늙지 않게 하는 불로장생 역할이고 우황청심환 같은 존재인 것 같다. 마음이 울적하고 슬프다가도 그 애랑 이야기하고 나면 마냥 순수해지고 단순해진다. 난 그 애를 통해 세상을 보며 그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는 멋진 곳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오래전에 본 '제8요일'이란 외국영화가 생각이 난다. 주인공은 죠지라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청년인데 그 영화에서 주장하는 바는 '신은 여덟째 날에 죠지를 만들었다(장애인). 그는 보기에 좋았더라'이다. 이 세상은 완전한 것으로만 이루어져야 좋은 것으로 우리 정상인들은 생각하지만 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인 것이다. 영화에서 푸른 풀밭에 서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모습에서 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똑똑하다고 하여 자신보다 부족한 인간에게 살 권리를 박탈할 자격은 없지 않은가! 그 영화에서 죠지는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억압과 편견에 맞서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현실속에서도 대부분의 장애인들 특히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제 하느님께서 내게 우리 딸을 주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엄마와 딸의 관계가 아닌 우리 모녀 사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닮은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안 닮았고 내 속에서 나와 난 껍데기가 되었지만 그 애는 알맹이가 튼실하지 못하니 늘 껍데기가 쭉정이가 되어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 알맹이를 부둥켜안아야 한다. 몇해전 신문기사에 어느 가정에 불이 났는데 딸이 정신지체였고 두 모녀는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나중에 시체를 보니 엄마가 딸을 너무 꼭 부둥켜안아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난 그 기사를 보고 펑펑 울었다. 나도 아마 그 상황이었으면 그랬으리라. 껍데기인 내 몸이 타들어가도 알맹이를 살리기 위하여…. 
  
 처음에 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내가 희생하는 이유를 대고 싶었다. 
  
 '그래! 전생에 내가 이 아이에게 큰 빚이 있었을 거야. 은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누군가 그랬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니깐 내가 가장 잘 키울 것 같아서 보내주신 거라고. 아니 혹시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또 다른 어떤 나쁜 일이 나에게 생기지 않았을까?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데려가느니 차라리 이 애를 맡아 기르는게 낫지. 아니면 정말 내가 죄가 많아서? 조상 탓인가?' 
  
 무엇인가라도 핑계를 대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괜히 나 혼자 억울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뿐인 인생인데 난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엇 하는 것인가? 난 그렇다 치고 우리 딸 인생은 무엇인가? 사랑도 못해보고 결혼도 못해보고 바보같이 살 것 아닌가? 하나뿐인 아들에겐 외롭지 않게 하려고 동생을 낳았는데 평생 짐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왜일까? 

 이제 딸과의 삶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가끔은 불쑥불쑥 화가 나고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니 짜증이 슬며시 나곤 한다. 그러나 난 이제 왜 우리 딸이 내게 태어났는지 따져 묻지도 않고 우리 딸을 더 이상 특별하게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 애는 내 딸이고 다른 엄마에게 자기 딸이 사랑하는 딸인 것처럼 역시 내게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이다. 
  
 * * * 
  
 오늘도 난 학교주차장에 서 있다. 

 봄날의 따뜻함이 계절을 느끼게 해주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해준다. 

 멀리서 딸의 모습이 보인다. 지척거리며 걷는 모습이 내 눈에 다가온다. 그래! 죽는 날까지 우리 딸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아니 죽는 순간에도 딸아이 이름을 부를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아이보다 먼저 간다면 죽어서도 그 아이와 함께하리라. 내 인생의 배역에서 내게 맡겨진 역할은 이렇게 담담하게 그 아이와 이 세상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같이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바다도 보고 그 애가 좋아하는 눈사람도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개나리꽃으로 화관도 만들어서 그애에게 씌워 주리라. 그리고 내 인생을 마감 하는 날 하느님께 기도하리라. 우리 딸을 제게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고…. 다음 생에도 우리 딸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그때는 이런 특별한 사이가 아닌 평범한 엄마와 딸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아주 평범한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벌써 개나리 꽃이 활짝 피었다 

 이번 봄에는 딸과 손잡고 개나리 꽃길을 마냥 걸어야겠다. 


평화신문. 기획특집 2007. 5. 27 [9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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