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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그분이 주신 빛..소중히 간직할게요"

관리자 | 2009.12.16 14:45 | 조회 4701

[오늘의 세상] [2009 그사건 그사람 그후] [5] "그분이 주신 빛…

소중히 간직할게요"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고 떠난 것
金추기경 각막으로 70代 둘, 시력 되찾아…
사람들도 '마음의 눈' 떠
金추기경 각막기증 이후 장기기증 운동 봇물…
종교·정파·지위고하 없이 묘역엔 아직도 추모 발길

10일 오후, 서울 모 아파트(43㎡·13평)에 사는 A(73) 할머니가 수영할 때 쓰는 하얀색 물안경을 쓴 채 현관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집안에서는 물론 바깥 출입할 때도 쓰고 다니는 물안경이다.

바깥 날씨가 추운데도 보일러를 틀지 않아 집안이 쌀쌀했다. 할머니는 "집안 공기가 더워져서 안구가 건조해지면 시력이 떨어질지 모른다"며 "좀 추워도 전기장판으로 버틴다"고 했다. 할머니는 인터뷰 도중에도 10~15분마다 물안경을 벗고 눈에 인공눈물을 떨어뜨렸다.

이처럼 할머니가 눈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살다 받은 '특별한 선물'이어서다. "어떻게 받은 눈인데…. 소중하게 간직해야지요."

A할머니는 19살 때 고향에서 과일을 따다 나뭇가지에 오른쪽 눈을 찔려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후 왼쪽 눈 시력까지 떨어져 1~2m 앞만 간신히 분간하는 상태로 나이를 먹었다. 2006년, 2007년에 각각 한 차례씩 왼쪽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경과가 나빠 도로 실명에 가까운 상태로 떨어졌다.

밝은 세상을 향한 할머니의 갈망은 간절했다. 할머니는 다시 각막 이식 수술 신청을 했다. 언제 차례가 올지는 막막했다. 2월 17일 오전 9시쯤 할머니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이 "각막이 준비됐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하고 선종한 이튿날 아침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A할머니는 이날 병원의 연락을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달려온 환자 2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병원 측은 "각막 이식 수술은 각막이 들어올 때마다 그때그때 이뤄진다"고 했다. 적출된 각막의 보존 기한은 7일이지만, 대부분 만 하루 안에 이식 수술이 이뤄진다. 김 추기경 선종 직후 일주일간 이곳에서 각막을 이식받은 환자는 A할머니 등 2명뿐이다.

수술을 집도한 서울성모병원 김만수(55) 교수는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할머니는 또다시 시력이 떨어질까봐 눈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관리해왔다. 할머니는 "올 2월 수술을 받은 뒤로 안경을 쓰면 시력이 0.4까지 나온다"며 "의사에게 '그분이 주신 각막이 맞냐'고 물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대답없이 웃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요즘 듣기만 하던 TV를 '눈으로' 본다. 경로당에 가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기도 한다. 최근 초등학교 6학년 외손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땐 손수 찹쌀밥을 지어 보냈다. 할머니는 "외손녀가 전화를 걸어서 '할머니, 밥 맛있게 먹었어요'라고 인사했다"며 웃었다.

수술 직후 할머니는 "가족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전국의 명물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서 강원도 메밀국수, 천안 호두과자 등이 나오면 직접 가서 먹고 싶어진다"며 "눈 상태가 더 좋아지면 제주도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선종한 이튿날인 2월 17일, 서울성모병원에서 각막이식수술을 받은 환자 두 명 중 나머지 한 명은 경북에 사는 B(70) 할아버지다. 8일 찾아간 B할아버지 자택(66㎡·20평) 현관에 놓인 할아버지의 장화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일 삼아 둘째 아들 밭에 가서 일하고 왔더니 그렇게 흙이 묻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올가을 추수한 팥을 말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30여년 전 다니던 공장에 폭발사고가 나서 왼쪽 시력을 잃었다. 그는 왼쪽 각막을 이식받기에 앞서 "한쪽 눈이 안 보이니 다른 쪽 눈도 자꾸 침침해지는 것 같아 농사일을 마음먹은 만큼 못했다"며 "시력을 회복해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할아버지는 "수술을 받은 뒤 눈이 좋아지니까 농사일은 물론 무슨 일을 하든 더 편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누가 각막을 기증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며 "김 추기경이 주셨든 혹시 다른 분이 주셨든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남은 평생 김 추기경님 말씀대로 항상 고마워하고 남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으로 빛을 되찾은 사람은 두 사람뿐이 아니다. 김 추기경의 뜻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이 각막·장기 기증 운동에 동참했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NOS)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까지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희망자는 17만6959명이다. 작년 같은 기간 희망자(7만59명)의 2.5배가 넘는다.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 김용태(54) 신부는 "김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하신 뒤, 각막·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막연히 두렵고 꺼림칙한 것'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꼭 해야 할 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김순자(67·서울 강북구)씨는 8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 있는 천주교 한마음한몸장기기증센터에 들러 피부와 장기,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목포에서 올라온 김씨의 친구 장영채(66)·백계순(63)씨도 이날 김씨와 나란히 장기 기증을 서약했다. 김씨는 "지난 3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도 병상에서 김 추기경님의 각막 기증 뉴스를 보고는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13일 오후 경기도 용인 천주교공원에 있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 묘역을 찾은 추모객들. 지난 2월 김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20만명이 넘는 추모객이 김 추기경의 묘를 찾았다./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남편은 장기기증을 하고 싶어했지만, 오랜 투병생활로 장기 상태가 좋지 않았지요. 그랬더니 '연구용으로 쓸 수 있도록 시신이라도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수첩, 책, 달력까지 '시신 기증 약속'이라고 적어 놓고 가족에게 '꼭 내 뜻을 따라달라'고 신신당부했지요. 저도 영감 뜻에 따라 장기와 시신을 모두 기증할 겁니다."

김 추기경은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따뜻한 '화해의 기억'도 남기고 갔다. 김 추기경 유해가 명동성당에 안치된 2월16일 밤부터 19일 자정까지 40만명 넘는 추모 인파가 명동성당에 몰렸다. 전·현직 대통령, 여·야 정치인, 불교·기독교·원불교 등 각 종교 지도자와 신자는 물론, 사장님과 근로자, 교수와 학생,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단 몇 분 동안의 작별인사를 위해 성당에서 2㎞ 넘게 줄을 서서 묵묵히 칼바람을 견뎠다.

명동성당 정문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문종기(60)씨는 "8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린 것은 처음 봤다"며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2월 17일 조문한 안소은(29·연세대 교육대학원)씨는 "그 많은 사람들이 새치기 하나 없이 5시간 넘게 기도하듯 조용히 줄을 서는 걸 보고 '경건함'이 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49) 교수는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는 경쟁과 분열이 극심했다"며 "화합과 소통에 목말라하던 수많은 사람이 김 추기경 선종을 계기로 돈과 출세 이외에 도덕적 가치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 반성하게 됐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 내 성직자 묘역에는 지금도 하루 100명 안팎의 추모객이 몰린다. 9일 오후 찾아간 김 추기경의 묘소 앞에는 화병 5개에 국화꽃이 가득했다. 성직자 묘역 잔디가 겨울이라 누렇게 변했는데 김 추기경 묘소 앞 일부분(가로 10m·세로 3m)만 푸릇푸릇했다. 안병주(46) 관리소장은 "하도 추모객이 많이 와서 할 수 없이 김 추기경 묘소 앞에만 인조잔디를 깔았다"며 "지금까지 20만명 이상이 김 추기경 묘소를 방문했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스님도 오고, 목사님도 오고, 일반인도 옵니다. 정·재계 주요 인사 중에도 남몰래 이곳을 찾아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바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200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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