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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특강] (3) 김준수 신부편 -그 길에서 " 생명, 진리의 길, 파스카의 길로

관리자 | 2008.12.15 22:25 | 조회 4397

 

 


 

"[사순특강] (3) 김준수 신부편 -그 길에서 "
생명, 진리의 길, 파스카의 길로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의 길에서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났다. 근본이자 핵심인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했다. 또한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귀의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고 고백했다. 하페 역시 그 길에서 자신과 하느님을 만났다.
 물론 사도 바오로가 걸었던 그 길도, 하페가 걸었던 길도 단지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꼭 짚고 넘어야 할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을 바른 빛으로 보고 알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향해 던진 질문 "너 어디에 있느냐?"의 바탕에는 하느님 앞에 서 있지 않을 때에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구원사의 첫 걸음을 뗀 아브라함부터 오늘날 우리 자신까지 모든 인간은 각자 인생길에서 자신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러 길을 걸어왔다.
 저마다 길을 떠난 출발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그 지향점은 생명이신 하느님이시며, 그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도달하게 돼 있다.
 수련장 때 수련자들과 도보로 성지순례를 했었다. 순례길은 인생 여정과 같다. 처음엔 아무 의식 없이 걷지만, 어느새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운다. 인생길도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생을 제대로 살려하면 할수록, 내면에는 의문으로 가득 찬다. 의문은 붙들수록 어려움이 수반되고 고통이 시작된다. 인생의 참된 그 무엇을 얻으려면 늘 십자가를 통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보편적 문제는 참된 자기와 만남을 회피하고자 스스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잊고 산다. 의문을 듣고 집중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멈춰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좀처럼 하느님 앞에 멈추지 않는다.
 참된 자아를 발견하지 않는 한 내가 만나 살아야 할 하느님과 관계는 마음으로 장난을 하는 것과 같다. 자신과 싸움은 내가 만든 하느님의 이미지를 깨는 일이다.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 뜻을 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죽는 것이 바로 순명이자 신앙이다. 바로 파스카의 삶이다.
 시련과 유혹은 인간 현실이자 삶의 과정이다. 유혹은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한다. 유혹은 어쩌면 하느님의 삶을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영적 교육일지 모른다. 유혹에 빠지면 인간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리고 낯선 곳을 헤매다 죽음으로 내닫게 된다. 루카복음 15장 작은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멀지 않듯, 죄가 클수록 은총은 가까이 와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혼 속에 갈망을 숨겨 두셨다. 생명에 대한 갈증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은 죽은 영혼이다. 죽은 영혼의 주인은 죄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께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신앙과 사랑 고백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관념이나 생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이것이 영성이다.
 인간은 죽어야 산다. 죽음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죽음이다. 라자로의 죽음은 거짓된 자아의 죽음이며, 이런 거짓된 자아가 죽음으로써 진정한 부활, 새로운 생명이 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생명, 충만한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다.
 모든 인생길은 '파스카의 길'로 통하게 돼 있다. 그 길은 삶과 죽음과 부활로 나뉘어 있지 않다. 파스카의 길은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하는 진리의 길이자, 생명의 길이다. 파스카의 길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으로 나가는 길이며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하는 삶이다.
정리=이힘기자 lensman@pbc.co.kr
평화신문, 2008. 03. 09발행 [9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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