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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견레21] 사형으로 국가 책임 끝?

관리자 | 2009.03.16 10:03 | 조회 9485

 

“인간이 변하는 걸 믿어야죠” [2009.03.13 제751호]

소설가 공지영씨(사진 가운데)와 3월6일 서울구치소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제 사형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말할 것도, 말할 기운도 없다”고 했다. 2004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출간 이후 얼마나 많은 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던가. 그러나 그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침묵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느낀 탓일까. 구치소 옆의 한 식당으로 옮겨 이야기를 이었다. 사형수의 대부 이영우 신부와 동료 자원봉사자인 김진희씨가 함께했다.

동영상; 공지영과 <한겨레21>이 교도소에서 만난, 매일매일 ‘하루’를 사는 사형수들

 

변한 뒤에 또 죽어야 한다니

“우리가 오늘 만난 사형수들은 10년 넘게 수형 생활을 한 사람들이에요. 너무 많이 변한 사람들이에요. 종교적으로, 양심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 그래도 살고 싶다고 말은 못해요. 사람을 죽였으니.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이렇게 변한 뒤에 또 죽어야 한다니 가슴이 더 아파요.”

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처럼, 서울구치소에 있는 사형수들은 수도자들 같다고 했다. “인간이 쉽게 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선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쁜 싹은 처음부터 평생 격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는 교화위원으로 일하는 성직자들의 태도를 보고 감동했다고 했다.

“천주교의 경우를 보면,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우리 자매님들이 사형수들을 아기 단계에서부터 다시 키운다는 느낌을 받아요. 사형수들에게는 ‘엄마’가 없었어요. 사형수들의 정서적 수준은 맨 처음 버림받았던 그때, 그 정신 상태에서 딱 멈춰 있어요. 상처받으면 무조건 반항하는, 중학교 2학년 같은. 그들에게 우리 신부님과 자매님들이 사랑을 주고 다시 키우는 거죠.”

사형수들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다. 흉악범들이 교회에 나온다고 곧바로 ‘성인’(聖人)이 되지는 않는다.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소설가 공지영씨.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그들은 거칠고 나쁜 삶을 살아온 이들이에요. 그들이 살아온 삶을 보세요. 맨 처음 만나면 정말 무서워요.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죠. 눈빛에는 미움과 증오가 가득하고. 지금은 말갛고 편안한 얼굴로 바뀌었어요. 그렇게 바뀐 것은 대단한 거예요.”

옆에 있던 이영우 신부가 말을 받았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정부 정책이 이대로 가면 연쇄살인범 강○○이나 유영철 같은 흉악범들이 더 많이 나올 겁니다. 없는 자들의 사회적인 소외감이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죠. 소외는 학대를 낳을 것이고, 어릴 적의 학대가 더 심해지면 이런 범죄는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전망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저소득층 공부방 예산을 계속 줄이고 있잖아요. 부모가 돌봐줄 수 없는 아이들을 낮 동안 대신 봐주는 건데, 공부방이 없어져 방치된 아이들은 어디로 가겠어요. 나쁜 곳으로 빠지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탈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공지영씨가 다시 받았다. 사형찬성론자들의 논리에 대한 공격으로.

“지난번(2월19일) 국회에서 열린 사형제 토론회에서 박준선 의원(한나라당)이 사형 집행을 주장했는데, 박 의원이 토론 중 ‘이론적으로는 대통령과 노동자의 인권은 동등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인간을 동등한 존재가 아닌 차별적인 존재로 보는 위험한 세계관이에요. 그런 철학 위에 있으니까 모든 것을 서열화해 우열로 보려 하죠. 탈락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어요.” 사형수들은, 살인범들은, 대부분 이 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한겨레21]  제7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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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죽나요” [2009.03.12. 제751호]

 

1991년 12월17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된 서지우(당시 36살)씨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8년 동안 이렇게 오래 두지 말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도 사형을 신속히 집행해주십시오. 사형수들은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아! 죽었구나’ 하고, 해가 지면 ‘아! 살았구나’ 합니다. 이렇게 1년 365일 동안 매일 죽었다 살았다 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두려움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절규였다.

2009년. 사형제를 부활하자는 말이 나온다. 아니, 폐지하지 않았으니 그냥 집행하자고 한다. 10년간 유예된 죽음, 다시 그 죽임을 되살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겨레21>은 사형의 당사자인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봤다. 또 그들을 가장 오래 지켜보는 교화위원들을 통해 그들의 말을 들어봤다. 그리고 그 죽음의 또 다른 당사자인 교도관과 피해자 가족들도 만났다. 과연, 죽음은 죽음으로밖에 갚을 수 없는가.

 

3월2일 오전 8시50분. “△△△번 접견 신청자는 2번 대기실 앞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접견실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접견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접견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10초쯤 지났다. 유리창 너머로 그가 들어왔다. 수감 번호가 찍힌 빨간 명패. 사형수임을 알리는 주홍글씨.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맑았다. 죽음과 싸우다, 죽음을 넘어선 자의 얼굴일까. 그를 소개해준 지인의 이름을 댔다. 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눈이 빨갰다. 이유가 있었다.

편지로나마 딸들에게 ‘좋은 아버지’

“저는 매일매일 ‘하루’를 사는 사람입니다. 1분 1초가 너무 소중하고 아깝습니다. 잠자는 게 너무 아까워 보통 하루에 3시간을 안 잡니다. 어제는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새벽 2시부터 비가 눈으로 바뀌더군요. 그걸 보자니 마음이 너무 설레어,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못 잤어요. 오늘은 유난히 더 빨가네요.”

시간을 아껴 그는 편지를 쓴다. 밖에 있는 딸들에게, 딸과 자신을 돌봐주는 누이에게, 몸이 아픈 노모에게 보낸다. 사회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형들과 동생들에게, 교도소 안에서 인연을 맺은 교정위원들에게. 편지 쓸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200통이 넘는 편지를 쓴다. 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편지로나마 ‘좋은 아버지’가 돼주고 싶기 때문이다.

”편지를 자주 쓰는 것은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고, 내가 느끼는 이 감정, 생명의 소중함, 이런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교정위원으로 그와 오래 인연을 맺어온 황수경 동국대 강사는 “사형수 아버지라는 존재가 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딸들은 아버지가 교도소 안에서라도 살아 있어 계속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 “이제 우리 죽나요”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그가 전한 교도소 안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사형수들도 장기수들도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규율이 엄해진 탓이다. 다가온 죽음의 공포에 식음을 전폐한 사형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고, 지금은 단지 시간이 길어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했다. 사형수로서의 삶은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주었다. “모기가 내 피를 빨아먹어도 죽이지 않습니다. 모기에게라도 뭔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을 뿐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거칠었다. 잔인했다. 동료 수감자들을 괴롭히고 군림했다. 몰래 담배도 피웠다. 어차피 죽은 목숨, 자포자기였다. 시간과 종교가 그를 깨우쳤다.

“지금은 그런 것 절대로 안 합니다. 살아 있음이 감사하니까. 그렇다고 죽지 않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 목숨은 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10분의 면회는 짧았다. 주변을 통해서도 그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영치금으로 돈 없는 수감자들을 돕고 있었다. 안경, 속옷, 내복, 법률 서적…. 그가 동료들에게 사준 ‘선물’들이다. 정작 자기가 간식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직원들도 ‘아무렇지 않냐’고 물어요”

3월5일 오전 11시40분. 또 다른 사형수를 만나는 시간이다. “×××호 접견자는 1호실로 가세요.” 그가 왔다. 짧은 머리에 껑충한 키, 옅은 갈색 수감복에 빨간 명패.

그는 오전에 작업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정부는 그간 사형수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원하는 이들에게 작업을 시켰다. 그들에게 작업은 노동이 아니다. 삶을 살아갈 이유다. 그에게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물었다.

“뉴스 봤습니다. 방 식구들은 뉴스 보면서 ‘저런 놈은 죽여버려야 해’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참…. (얼마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동료들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내가 봐도 강○○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저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면이 있었는데, 강○○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렇게 살인을 했다니….” 그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못을 저질러 형을 살고 있는 몸이라 사형에 대해 할 말은 없습니다. (사형이 집행된다는 말 등에 대해) 애써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법이라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인입니다. 저라고 왜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요즘 작은 것에도 큰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요즘처럼 날이 따뜻할 때는 밖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이루 말로 못할 행복감을 느낍니다. 요즘은 서울에 있는 보살님(교화위원)이 편지로 많은 깨달음과 도움을 주시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왼쪽부터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들 접견을 마치고 나온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최형규 신부와 손선하 수녀.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들과 미사를 드린다. ‘사형수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조성애 수녀도 서울구치소를 방문했다. 조 수녀는 팔순을 2년 앞둔 지금도 꾸준히 사형수들을 만나 교화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21> 윤운식·류우종 기자

10분이 됐다. “다음 사람을 위해 속히 접견실을 비워주십시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혹시 소원이 있냐”고 물었다. 유리 칸막이를 너머 마이크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안 들린다는 듯 귀를 한 번 가리킨 뒤 조용히 합장을 했다.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 역시 사동 안팎 청소와 식당 설거지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불교 쪽 교화위원으로 일했던 황수경 동국대 강사는 최근 한 사형수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요즘 공장(교도소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직원들도 ‘아무렇지 않냐, 힘들지 않냐’고 묻고는 해요. 그러면 저는 ‘왜요?’라고 되물어요. 요즘 한나라당에서 정부에 사형수들 집행하라고 연일 떠들어대는 것을 TV 뉴스나 신문에서 보고도 제가 우울해하지도 심각해하지도 않고 늘 웃고 밝게 생활하니 이상했던가 봐요. 그런데 꼭 그렇게 심각해야 하나. 주어진 하루를 늘 열심히 살고, 나의 죄에 대해 늘 참회하고 살면 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을.” 마음은 죽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도 다른 사형수들의 상황은 걱정했다. “사형수들 대부분은 힘들어하고 있나 봐요. ○○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 형제들 몇은 무척 힘들어한다고 하네요.”

그랬다. 힘들어했다.

“살고 싶다는 욕망도 사치”

3월6일 오후 2시40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소설가 공지영씨를 만났다. 천주교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사형수 2명을 접견하고 나온 자리였다. 공씨는 지난 2003년께부터 사형수들을 만나왔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경험의 축적이기도 하다.

“오늘 만난 사형수들은 강○○씨 사건을 접하는 순간에 자신이 가해자가 된 듯한 고통을 느꼈다더라고요. 살해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기가 죽인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한 괴로움도 들고….” 사형수들의 얼굴은 평화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배어나왔다고 한다.

“사형 집행 관련 뉴스가 나올 때는 맨 처음 사형 판결을 받던 때의 공포감이 되살아나더래요. 물론, 그 사형수들이 죽인 사람들도 그런 공포에 떨었겠죠. 그래도 죽음으로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인위적인 죽음을 기어코 안긴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교정사목부 강창원 신부는 지난 2월27일 사형수들을 접견했다.

“미사를 올리던 사형수 한 명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불안하다’고 고해했습니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니까, 목숨에 무심해졌다고 말하는 사형수들이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느끼는 겁니다.”

자포자기한 사형수도 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60대의 사형수다. 영화 <마이 파더>에 나오는 사형수 아버지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다. <마이 파더>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 자신의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20여 년간 그려온 아버지를 찾아보니, 교도소에 있었다는. 그것도 사형수였다는.

» 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이영우 신부가 자신에게 온 사형수들의 편지를 읽고 있다. 이영우 신부는 일주일에 한 통 이상 사형수들의 편지를 받는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광주교도소 교화위원인 안영목 목사는 “지난 2월에 그를 만났더니 ‘목사님, 우리 그냥 죽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더라”며 “자기는 사형제 폐지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말했다. 안 목사는 “사형이 확정된 뒤 벌써 14년이 흘러 나이도 들고 몸도 마음도 약해지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사형수들은 중죄인들이다. 적어도 1명 이상의 사람을 고의로 죽였다. 그들이 삶에 매달릴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변했다. ‘살인마’에서 ‘신실한 신앙인’으로, 지독한 ‘앙심’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줄 아는 ‘양심’으로.

서울구치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미결수가 입소했다. 그는 목욕은 물론 일상적인 세수도 거부했다. 감방 안도 도저히 사람이 머물 수 없을 만큼 비위생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벽에 오줌도 눴다고 한다. 감방 안을 소독해야 하는데, 반항이 너무 심해 쉽지 않았다. 그때 사형수 도○○씨가 나섰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이 미결수는 도씨 앞에서는 조금 고분고분했다. 도씨는 교도관들에게 “제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함께 씻을 테니, 그사이 감방 안을 치우시라”고 했다. 그 사형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미결수의 몸을 구석구석 씻기고 옷도 빨아 갈아입혔다.

믿음을 깨친 사형수들은 자신의 남은 삶을 ‘교화’에 바치고 싶다고 빈다. 사형수 시몬(세레명)이 이영우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기가 함께 실려 있었다.

“내가 받은 사도직은 교화다. 나의 사명은 출소자의 재범을 한 건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재소자들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가장 자연스레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재소자라고 생각한다. 그 재소자가 최고형을 받은 이라면 상대 재소자의 마음을 더 잘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영우 신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가장 잘 따르는 존재가 사형수들”이라며 “사형수들이 재소자들, 특히 소년범들의 교화에 나서면 정말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사형수에게 새로운 삶을 주면 그는 어떻게 바뀔까. <한겨레21>은 지난해 1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씨를 3월4일 만났다(그의 죄목은 살인강도였다). 그는 “신부님은 잘 계시냐”고 첫 말문을 열었다.

» 1997년에 형이 집행된 사형수가 죽기 전에 이영우 신부에게 건넨 수예품. 줄 것이 없는 사형수들은 오랜 시간 만든 자신의 수예품들을 교화위원들에게 선물로 건넨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사형과 무기는 뭐가 다를까. “이제 교도소에서나마 ‘내일’이 있다는 점입니다. 감형받고, 처음엔 멍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유영철이 잡혔을 때부터 그때까지 매일밤 죽음을 준비하던 저였거든요.” 죽음만 있던 생활이 삶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교도소 내 봉제공장에서 일한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고아 출신인 그는 중학교를 겨우 마쳤다. “무슨 비전이 있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저에게 새로 주어진 목숨인데 어떻게든 값되게 써야 한다는 생각뿐….”

‘소원이 뭐냐’고 묻자, 그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교도소 안에서라도 한 번 더 새롭게 삶이 주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에서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겠죠. 달갑게 받아들여야겠죠. 그래도 교도소 안에서 영원히 참회하고 반성하면 안 될까요. 다른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그런 기회는 주어질 수 없을까요.”

사형수들은 법명이나 세례명으로 얻게 되는 새 이름을 좋아한다. 죄인이었던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새로운 이름으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개명만으로 이들은 부활하는 셈이다.

강력범죄 예방에 무엇이 도움이 될까

사형수를 죽이는 것과, 사형수들이 재소자들의 마음을 돌려 범죄의 세계에 다시 빠지는 것을 막는 것. 어느 것이 강력범죄 예방에 더 도움이 될까.

공지영씨는 2월6일 오전, 사형수를 만나러 나서다 휴대전화로 들어온 ‘오늘의 성경’ 내용을 보고 그대로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오늘의 성경은 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1절부터 28절의 내용이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명박 정부는, 믿음의 정부, 섬기는 정부라고 한다. 그 말씀을 한 신은 다른 신이었을까.

유영철 변호인 차형근 변호사

“기회가 주어지니 그도 변하는구나”

차형근(51·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사무총장) 변호사. 2004년 7월부터 12월까지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다. 사형 폐지라는 평소 소신에 따라 지존파와 온보현 등 연쇄·잔혹 살인범들의 변호를 도맡아왔던 차 변호사다. 차 변호사도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을 때 ‘과연 사형제를 폐지해야 하는가’ 하는 심한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그 이전의 지존파나 온보현은 변론을 하다 보면 ‘아,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영철은 ‘저런 존재도 살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만 거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던 때를 되돌아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유영철을 처음 만나서 ‘난 사형 폐지가 신념이다. 그 일환으로 사형선고를 한 명이라도 줄이는 변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변론을 맡겠다’고 하니 변론을 맡기더군요. 그런데 구치소로 유영철을 만나러 간 첫날, 구치소장이 불러요. ‘당신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변호사와 피의자의 접견 장소에는 교도관이 입회하지 못하니까. 당시 접견실은 철문이 닫히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는 구조였어요.”

유영철은 대뜸 차 변호사에게 “제가 죽기 전에는 사형 폐지 안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차 변호사가 접견을 오면 경찰이나 검찰에서 밝히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씩 밝히기 시작했다. 주로 여성들을 어떻게 살해하고 주검을 어떻게 훼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육의 어떤 부위를 어떻게 먹었는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기자도 그 말들을 도저히 옮길 수 없다).

차 변호사는 “매일매일이 앉아서 생고문당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법정에서 유영철의 태도는 더 잔인했다. 딸을 잃은 충격으로 사지에 중풍이 온 아버지에게 유영철은 “딸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 배려로 당신과 통화하도록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피해자 아버지는 이 말에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뒤틀며 거친 신음만 토했다. 차 변호사는 “그 아버지는 이후로 얼마 살지 못한 것으로 안다”며 고개를 저었다. 유영철의 증언을 듣던 황학동 피해자의 형은 그 충격으로 자살했다. 그 고통은 차 변호사에게도 그대로 밀려왔다. 변론을 하던 넉 달 사이에 10kg의 체중이 빠졌다. 평소 자신했던 건강도 1km 거리만 걸으면 지칠 정도로 악화됐다. 변론을 마친 뒤에도 심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과 신체적 고통으로 1년 가까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유영철의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렸다.

“2년쯤 지난 뒤에 한 수녀님으로부터 유영철이 그간 숨겨왔던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면서 딸을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일가족을 잃고도 자신을 용서한 피해자 유족에게 유영철이 보낸 편지도 읽게 됐습니다. ‘아, 기회가 주어지니 유영철도 변하는구나’ 싶더군요.” 그 뒤 차 변호사는 다시 용기를 얻어 사형 폐지 운동에 나서게 됐다. 지금도 유영철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창백해지긴 하지만.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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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으로 국가 책임 끝? [2009.03.13 제751호]

 

딸을 잃은 뒤 범죄피해자가족모임에서 ‘사형수’를 만나 용서를 배운 김기은씨

“오늘 두 분께서 오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새삼 알게 되었고, (중략) 두 어르신과 같이 선하신 분들이 증오와 절망의 눈물을 더 이상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드려야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과 절망의 바다에 또 다른 누군가가 빠지지 않도록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막아드리고 싶습니다.”

» 김기은씨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

한 사형수가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을 만난 뒤 쓴 편지다. 2007년 12월21일,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4명의 사형수와 2명의 피해자 가족이 만났다. 김기은(62·여)씨에게 그 만남은 4년 전 딸을 잃은 고통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김씨는 2005년 10월1일 스물아홉이던 딸을 잃었다. 딸은 결혼을 전제로 6년째 사귀던 남자친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어쩌면 사위가 됐을지도 모르는 범인은 딸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14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랑 얘기할 때도 그냥 하는 법이 없어요. 팔짱을 끼고, 끌어안고, 너무나 살갑던 딸이었는데….” 김씨는 딸의 얼굴이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뿐이던 딸이 숨지고 김씨는 한동안 분노와 절망 속에서 살았다. 딸의 장례를 치르는 도중에도 범인의 장례식장을 뒤졌다. 그의 빈소를 찾지 못해 경찰에게 소리 질렀다. “그놈 어딨냐. 그놈은 안 죽은 거냐. 그놈 잡아내라. 그놈 죽여달라.” 울면서 소리쳤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날들이었죠. 남편과 둘이 고개를 푹 숙이고 집 앞 둑방길을 걸어다니다 집에 와서 말없이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게 일이었어요.” 부부간 대화도 거의 없었다.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생살이 뜯겨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김씨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에서 하는 범죄피해자가족모임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또 다른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됐어요. 분노보다는 잊는 것이, 그래도 잊혀지지 않을 때는 용서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어요.”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김씨는 조금씩 ‘용서’를 생각하게 됐고, 사형수와의 만남을 결심하게 됐다.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들일지 무서웠어요. 그런데 하염없이 울고 또 울더라고요. 용서해달라는 말조차 못해요. 우리가 자신들을 만나서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며 9일 동안 기도만 했다더군요.” 김씨는 그 만남 뒤 사형을 반대하게 됐다.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들이 있잖아요. 그 부모도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어요. 사형은 사형수 가족에게 또 한 번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차 피해 최소화하는 법률 제정해야

김씨는 “국가가 이미 잡은 범죄자를 죽이는 것보다 범죄로 인해 상처받은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하고 보호할 건지에 더 신경을 써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범죄피해자가족모임에서 만난 가족들은 살인·방화 등으로 피붙이와 재산은 물론 자신감까지 잃고 삶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도 깨진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자꾸 엇나가고 어두워져 걱정하는 엄마들도 있고, 아이를 잃고 다툼만 하다 이혼에까지 이르는 부부도 많다. “이런 가족들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상담해주고, 기간을 정해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절실해요. 사형수를 죽인다고 죽은 내 딸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범죄피해자가족모임을 관장하는 이영우 신부는 “사형은 국가가 ‘피해자 인권’을 빙자해 가장 손쉽게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일 뿐”이라며 “사형수를 죽이고 나서 ‘법질서를 확립했다’고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쉽고도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신부는 “2006년부터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전국에 생기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고 지원도 형식적일 뿐”이라며 “치유·상담·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관련 기금을 확보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경찰 수사과정 등에서 입는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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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2009.03.13 제751호]

 

직업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교도관들, 사형장의 기억과 촉감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왜 지금 와서 그런 걸 묻고 그래요. 겨우 가슴에 묻고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 없어요.”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지난 1997년 마지막 사형을 집행한 경험이 있는 그는, 지금은 은퇴해 경기 일산에 살고 있었다. 사형 집행 경험이 있는 교도관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한 전직 고위 교정공무원(교도소장 출신)은 “90년대 말에 은퇴한 문아무개 교도관은 사형 집행 당시 받은 심적 고통으로 은퇴 직후 속세를 떠나 출가했다”며 “교정공무원들에게 사형은 참으로 힘든 내적 고통”이라고 말했다. 사형 집행 직후 충격으로 그만둔 교도관은 허다하다고 한다. 사형 집행 때문에 이혼한 교도관도 있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렇게 깊은 상처를 남겼을까?

» 1987년까지 운영됐던 서울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사형장 풍경. 오른쪽의 교도관이 포인트라 불리던 레버를 당기면 교수대 바닥이 꺼지는 구조였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사형은 교도관의 십자가”

사형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쩌면 교도관일지 모른다. 이들의 임무는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재소자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평소 사형수와 한 공간에서 지낸다.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도 있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있다. 그 속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법무부 장관의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사형수는 거개가 돈이나 원한의 동기로 인간을 죽인 죄를 지었다. 교도관은 그런 동기도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 단지 직업이기 때문에.

한 교화위원을 통해 사형에 대한 한 현직 교도관의 심경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사형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다.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중 누군가는 사형장에 들어가야 한다. 5명의 교도관이 5개의 집행 버튼을 동시에 누르지만, 결국 그중 한 명은 사형수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나. 교도관이라는 직업을 사람 죽이려고 택한 것은 아니다. 1997년이었다. 사형 집행 이야기가 돌면서 다들 ‘나는 못하겠다’고 해서 교도소 전체가 뒤숭숭했다. 그때 집행하러 들어간 교도관들이 집행하고 나서도 며칠 동안 한숨도 못 자고 힘들어했다.”

문장식 상석교회 목사는 “사형이 있기 전날엔 교도관들이 많은 술을 마신다”며 “어떻게 제정신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사형 집행 당일에도 교도관들은 밤새 통음한다. 입회한 검사와 검사시보도 마찬가지다. ‘악령·귀신이 집까지 따라간다’는 속설에 따라, 사형 집행 당일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이들의 관행이다. 사람을 죽이고 도저히 가족을 볼 자신이 없어 만든 미신일 것이다.

 

사형 집행 당일. 교도관 3명이 사형수를 방에서 데려온다. 교정용어로 ‘연출한다’고 한다. 2명이 팔짱을 끼고, 1명이 앞장선다. 사형수들은 처음엔 순순히 따라온다고 한다. 그러나 사형장 부근에 이르면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기도 한다. 교도관들은 그럴수록 더 힘껏 팔짱을 껴야 한다. 울며불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억지로 형장으로 끌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형장에는 소독약인 클레졸 냄새가 가득하다. 사형 전날 재소자들이 청소할 때부터 뿌리기 시작해, 형이 집행되고 주검을 내릴 때마다 또 뿌린다.

입회관석에서는 소장과 보안과장, 입회 검사와 서기 그리고 성직자(교화위원) 등 20여 명이 사형을 지켜본다. 사형수는 입회관석 앞에서 ‘범죄 사실을 인정하냐’는 소장의 인정심문을 받고 유언을 남기게 된다. 교도관들은 성직자들의 예배나 예불 소리를 들으며 사형수의 얼굴에 용수(얼굴가림천)를 씌우고 교수대로 끌고 들어간다. 목에 올가미를 걸기 전, 발버둥을 막기 위해 손발을 묶는다. 올가미가 걸린 것이 확인되면 교도관 5명이 집행 버튼을 누른다. 발밑이 꺼지고, 목이 매달린다. 교수형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게로 스스로의 삶을 끊어야 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인정심문부터 교수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는다.

 

»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의 사형 장면. 살인과 사형이라는 두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독한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로 꼽힌다. 그 고통은 교도관들에게 그대로 남는다.

서울구치소 첫 사형 집행일에 생긴 일

질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곳이니만큼 끔찍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1989년 8월4일, 경기 의왕시로 자리를 옮긴(1987년 11월 이전) 서울구치소에서 첫 사형 집행이 있었다. 첫 사형 집행 대상은 김동술(당시 26살)씨였다. 교도관들은 신부의 집도가 끝나자 곧바로 그의 머리에 흰 용수를 씌우고 손발을 묶었다.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교도관들이 집행 스위치를 눌렀다. 바닥이 내려앉지 않았다. 당황한 교도관들은 그를 옆으로 밀어놓고 형틀을 수리했다. 김동술은 용수를 쓴 상태로 쓰러져 벌벌 떨었다. “주여, 이 몸을 거두어주소서”라고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45분 뒤, 그는 다시 목매달렸다. 그간 그에게 연장된 것은 삶이 아닌 죽음이었다.

교도관은 사형수의 체중과 키에 따라 올가미 밧줄의 길이를 조절해야 한다. 잘못 계산하면 낭패가 벌어진다.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 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고중렬(77)씨의 말이다. 고씨는 서대문구치소 시절 교도관으로서 수많은 죽음을 집행해야 했다. “사형수의 목에 오랏줄이 제대로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포인트(사형 집행 장치)를 당기면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집니다. 밧줄이 너무 길게 잡혀서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는 사형수들의 목에 다시 올가미를 걸고 끌어올려 매달아야 한다.

 

여성 사형수들의 집행은 더 처연하다. 문장식 목사가 기록한 1991년 12월17일의 일이다. 사형수 강영리(당시 36살)씨와 홍순영(당시 24살)씨의 집행이 있었다. 강씨는 살인교사, 홍씨는 유괴살인으로 사형을 확정받았다. 오후 3시15분, 강씨는 “(찬송을) 더 크게 불러주세요”라고 목멘 소리로 외치며 교수대로 끌려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도 끊겼다. 교수형이 집행되면 경추 골절로 즉사하거나 질식사한다. 후자의 경우 완전한 사망까지 10여분이 걸린다. 문 목사의 메모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집행 교도관들이 휘장 속에서 하는 말이 밖으로 들렸다. 한 직원이 ‘갔어?’라고 말하니, 다른 직원은 ‘오래가’라고 답한다. 조금 있다가 ‘가버렸어?’라고 하니, 다른 직원은 ‘아직 멀었어’라고 한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오후 3시35분, 홍순영씨가 끌려왔다. 작은 키에 앳된 몸매였다. 소장의 인정심문에도 대답을 못하고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마지막 유언을 하라는 소장의 말에도 고개만 흔들었다. 입회한 김우성 신부가 가톨릭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흐느껴 울기만 했다. 흐느끼는 홍씨를 교도관들이 교수대로 끌어갔다. 오후 3시50분에 형이 집행됐다. 오후 4시 정각에 죽음이 확인됐다. 문 목사는 “홍씨는 형 확정(1991년 9월) 뒤 넉 달도 지나지 않아서 마음의 준비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면담이 있다’는 교도관의 말에 따라 나왔다가 갑자기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사형은 징벌적 차원을 넘어선다

이런 모든 순간의 기억과 촉감, 그 비명과 발버둥을 교도관들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지난 10년간은 전국 1만여 명의 교도관들에게도 그런 고통이 중단된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 고통의 시간이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천주교 대전교구 교정사목부의 강창원 신부는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은 국가 대신 죽음을 실제로 집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가 겪는 고통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사형이라는 형벌이 한 사회에 주는 고통은, 사형수 한 명의 목숨을 징벌적 차원에서 뺏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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