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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더 나이 들면 늦지요…" 쪽방촌 인술

관리자 | 2009.07.23 09:52 | 조회 4651
"더 나이 들면 늦지요…" 쪽방촌 인술

 

또 한 명의 '영등포 슈바이처' 신완식 요셉의원 의무원장
"조금이라도 젊을 때 2% 모자란 인생 채워 나가자"
정년 6년 앞둔 교수직 떠나 '낮은 곳'서 제 2인생
"600명 자원봉사자 보며 우리 사회의 건강함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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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완식 요셉의원 의무원장이 15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병원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15일 오전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 골목' 어귀에 자리한 요셉의원.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옥상에서 쪽방촌을 내려다 보던 신완식(59) 의무원장의 눈길이 화분에 물을 주는 옥탑방 노파에게 머물렀다. 진기한 것을 발견한 듯 그가 말했다. "저걸 봐요, 아무리 어려워도 다들 생명을 가꾸고 있잖아요."

국내 감염내과 권위자로 첫손에 꼽히는 신 원장은 올 2월 가톨릭대 의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3월 중순 요셉의원에 부임했다. 무보수 봉사직인 새 일터는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1945~2008) 원장이 1987년 세운 행려노숙자 무료진료 병원이다.

여의도 성모병원 감염내과 과장이자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이던 그가 미련 없이 중역을 내려놓고 '낮은 곳'에 임할 줄은 가족도 몰랐다. 요셉의원 이문주 원장 신부는 "고(故) 선우 원장에 이어 또 한 명의 '바보'가 탄생했다"고 했다.

정년을 6년이나 앞두고 내린 결단에 대해 그는 "정년 퇴직한 선배들이 나이 탓에 선뜻 봉사에 나서지 못하는 걸 보면서 조금이라도 젊을 때 봉사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대학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보람됐지만 '이것만으론 2% 모자라는 인생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고 했다.

정년 채울 생각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막상 사직서를 내자 아내는 무척 당황했다. "진짜 그만 둘 줄 몰랐던 거죠. 고맙게도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뜻대로 하라'고 하데요. 하지만 서운함이 전부 가시진 않았겠죠."

부임 직후 찾아 뵌 정진석 추기경은 "지지를 받으며 일을 시작하면 나중에 갈등을 겪기 쉽지만, 애초 갈등이 있으면 서로 맞춰가며 오래 해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스승인 정희영(85) 가톨릭대 명예교수께도 송구스럽다. 제자의 퇴직 소식을 들은 정 교수는 전화를 걸어 "내가 아프면 신 선생에게 맡기려 했는데 그리 안되겠군요"라고 말해 신 원장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오전 5시30분이면 병원 출근길에 나섰던 그는 이제 같은 시간 동네 목욕탕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막내딸과 아침상에 마주앉는 것도 흐뭇한 생활의 변화다. 요셉의원엔 매주 이틀 출근한다.

오전 11시쯤 병원에 도착해 진료 준비를 한 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환자를 살핀다. 진료 없는 날은 친구들을 만나거나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전세로 얻은 빌라에서 책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지난달 일주일은 몽골에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경쟁이 치열한 교수 사회를 벗어나 누리는 '슬로 라이프'는 봉사만큼 달콤하다. "석 달쯤 되니까 집사람이 묻더라고. 후회스러운 거 없냐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전혀 없다'고 했죠." 하지만 식사 속도만은 늦춰지지 않는다.

이날도 병원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들던 봉사자들보다 일찍 자리를 뜨면서 "꾸물댔다간 끼니 놓치는 것이 의사 일이라 빨리 먹는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라며 웃었다.

하루 100명 이상의 환자가 오는 터라 진료 시간엔 쉴 틈이 없다. 진료 기록이 전산화 돼있지 않아 신 원장은 환자를 맞을 때마다 두툼한 차트를 날렵하게 들추며 증세를 묻는다. 선우 원장 시절처럼 처방은 이면지로 만든 메모지에 적는다.

요셉의원엔 당뇨, 고혈압, 지방간 환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영양이 부실한 상태에서 자주 술을 마시고, 처지에 대한 비관과 자책으로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당부해도 제 몸을 살피지 않는 환자를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점심 때 환자들에게 빵을 나눠주는데 당뇨가 있으면 감자와 계란을 대신 줘요. 하지만 배가 고프니까 가리지 않고 먹거든. 당뇨보다 배고픔이 더 절박한 문제니 말리기도 힘들죠."

다른 안타까움도 있다. 60명이 넘는 의사 봉사자 덕에 외과, 치과, 피부과, 산부인과 등 종합병원에 못잖은 진용을 갖췄지만 입원실이 없어 응급 환자가 오면 다른 병원을 급히 연결시켜주느라 진땀이 난다.

후원만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비싼 약이나 의료 장비를 들이는 일도 쉽지 않다. 그는 "병원 설립 정신을 지키면서도 운영의 효율성을 개선할 방안을 구성원들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원장에게 요셉의원은 봉사의 위대함을 항상 일깨워주는 곳이다. 전문의부터 청소, 빨래, 목욕 담당자까지 병원을 지탱하는 600여명의 봉사자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실감한다고 했다.

"한 목욕 봉사자 말씀이 환자 발을 씻기는데 고통스러울 만큼 심한 냄새가 나더래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그 발에 키스를 했더니 냄새가 안 느껴졌다는군요! 봉사의 힘이란 참 대단하죠."

그는 가톨릭대 선배인 선우 원장과 자신을 비교하는 세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대단한 분이고 나와는 전혀 다른 분이죠. 단적으로 그분은 독신이었지만 나는 결혼해 세 딸을 뒀거든(웃음)." 신 원장은 "어떤 책을 보니까 은퇴 후엔 자기 삶의 나무를 만들어야 한다더라. 어떤 나무를 키울까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한국일보]  2009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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