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료실

생명의료윤리의 대두-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

관리자 | 2008.12.15 21:45 | 조회 9125

의학속 사상/(22) 2006. 3.17
생명의료윤리의 대두-뉘른베르크 강령과 헬싱키 선언
» 황상익/서울대 교수·의사학


현대사회에서 생명의료윤리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피험자의 자발성’과 ‘공공 감시’(IRB, 즉 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대표적인 감시기구이다)이다. 나치의 잔악한 생체실험을 경험한 인류는 인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연구에 사용하는 경우, 피험자나 제공자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나치의 인체실험에 참여한 의사와 과학자들은 의학 발전, 난치병 치료, 국익 등 연구가 가져올 이익을 이유로 피험자들의 인권을 침해한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하였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은 그러한 변명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연구 목적이 숭고하고 그 결과가 가져올 이익이 클지라도 피험자의 자발적인 동의 없이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뉘른베르크 재판보다 한 세기 앞서, 현대실험의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프랑스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설령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도움이 될지라도, 피험자에게 조금이라도 해로움을 줄 수 있는 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갈파한 바 있었다. 당대 최고의 생명과학자가 그에 걸맞은 생명과 인간 존중의 모범을 보였던 것인데, 인류는 사상 최악의 경험을 통해 베르나르의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미국과 영국 등 2차대전의 승전국도 반인륜적인 인체실험 혐의가 다분하지만, 특히 독일과 일본(731부대와 100부대)은 강제수용소의 수용인 등을 대상으로 온갖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이러한 연구에는 세균전, 화학전에 관련된 실험과 압력, 추위 등 물리적 요인에 관련된 실험들이 있었다. 특히 악명 높았던 멩겔레((Josef Mengele)는 다음과 같은 실험들을 자행하였다. 멩겔레가 행한 세균학 실험은 쌍둥이 가운데 한 명에게 세균을 주입하여 죽으면 나머지도 같이 죽여 두 시체의 장기들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어떤 쌍둥이들은 죽을 때까지 얼마만큼 혈액을 뽑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에 사용하기도 했다. 피험자들은 거세되기도 했고, 수혈 반응을 보기 위한 실험에 쓰이기도 했다. 멩겔레는 쌍둥이의 혈관과 장기들을 붙여 샴쌍둥이를 만들려는 실험도 했다. 이런 예는 끝이 없을 정도이다.

2차대전이 끝난 뒤인 1945년 10월, 전쟁범죄, 반평화범죄, 반인류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하는 국제협약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협약에 따라 인체실험에 관여한 23명의 독일 의사들과 과학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1946년 12월 9일에 시작된 재판은 139번에 걸친 공판 끝에 1947년 8월 19일 판결이 내려졌다.

세균실험 쌍둥이끼리 ‘대조군’

재판부는 나치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체실험을 판단하기 위한 의학적·윤리적 기준을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1803년 영국 의사 토마스 퍼시벌이 만든 윤리강령, 미국의사협회의 1847년 윤리강령, 1865년 베르나르가 제안한 인체실험 원칙 등을 참조하였다. 독일은 불완전하긴 하지만 1931년에 인체실험에 관한 윤리지침을 제정한 바 있는데, 나치 의사들은 이 지침을 아예 무시하였다.

재판부는 오랜 숙고와 논의 끝에 판결문 외에 강령 10개 조항도 함께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치 전범들의 단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허용 가능한 의학실험>이라는 제목의 이 10개 조항이 뉘른베르크 강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재판부는 강령의 서문에서 “인체실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회에 이익과 선을 가져다 주며, 다른 방법으로는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재판부는 도덕적, 윤리적, 법적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특정한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라고 적시하였다. 즉, 이 강령은 인체실험에 대한 견고한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0개 조항 중에서도 핵심은 다음과 같은 제1항이다.

»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았던 멩겔레.

“인체실험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실험대상자가 동의를 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어떠한 폭력, 기만, 협박, 술책, 강요가 없는 가운데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분명한 이해와 지식에 근거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험대상자에게 실험의 성격, 기간, 목적, 방법, 예상되는 불편과 위험, 건강상의 영향 등에 대해 알려 주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실험을 지도하고 참여하는 연구자 개개인에게 있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사상 최초로 국제적으로 채택된 의학연구윤리 강령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그 뒤 개별 국가 수준에서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마련된 윤리강령과 법규들은 뉘른베르크 강령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강령의 효력은 점점 커졌다. 유엔이 제정한 <일반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과 1947년 세계의사회(WMA)의 <제네바 선언>은 강령의 정신을 특히 잘 반영한 대표적인 문서이다.

세계의사회는 제네바 선언 이후 인체실험 문제를 더욱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몇해 동안의 면밀한 논의 끝에 세계의사회는 1954년 제8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인체실험에 관한 결의: 연구와 실험 종사자를 위한 원칙>을 채택하였다.

“① 실험은 언제나 피험자 개개인에 대한 존중의 원칙을 지키는, 자격을 갖춘 과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② 실험결과는 항상 사리분별과 조심성을 가지고 발표하여야 한다. ③ 인체실험의 일차적 책임은 연구자에게 있다. ④ 건강한 피험자에 대한 실험에서 연구자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뒤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를 구하는 모든 절차를 취해야 한다. 환자가 피험자인 경우는 환자나 가까운 친지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연구자는 실험의 성격과 목적, 실험이 내포한 위험 등을 피험자나 피험자에 대해 법적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⑤ 대담한 수술이나 치료법은 오직 절박한 상태의 환자에게만 행할 수 있다.”

참혹한 반성 뒤 안전장치 마련

세계의사회 윤리위원회는 활동을 계속하여, 1954년의 5개 조항을 수정하고 발전시켜서 <헬싱키 선언>을 발표하였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관련하여 의료인에게 지침이 되는 권고 사항을 담은 헬싱키 선언은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제18차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헬싱키 선언의 주요한 개정은 1983년부터 1989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윤리성 심사를 위한 위원회(IRB)에 관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또한 동의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피험자의 경우, 법적 대리인의 동의만을 인정하도록 했다. 2004년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의사회 제56차 총회에 이르기까지 7차례에 걸쳐 보완된 헬싱키 선언(총 32개 조항)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과학 원칙에 따라야 하며, 연구대상자(피험자)들의 건강과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윤리적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

2. 실험 계획과 수행은 독립적인 윤리심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한다.

3. 연구대상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는 과학 발전과 사회의 이익에 앞서야 한다.

4. 약자의 입장에 있는 연구대상자들은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

5. 연구대상자가 연구자와 종속관계에 있는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한다.

6. 연구 자체의 목적과 방법, 예견되는 이익과 내재하는 위험성 등에 관하여 연구대상자에게 사전에 충분히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부터 충분한 설명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이루어진 동의를 받아야 한다.

7. 동의는 그 연구에 참가하지 않고 독립된 위치에 있는 의료인이 받아야 한다.

8. 법률상 무능력자에 대해서는 국내법에 따라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9.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연구자는 이 선언에 규정된 원칙을 따라야 한다.

10. 학술지는 이 선언을 준수하지 않는 논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치와 731부대 등의 생체실험 만행은 ‘광기’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과학의 진보, 난치병 치료 등의 ‘성스러운’ 목적 아래 그런 ‘연구’를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헬싱키 선언이나 뉘른베르크 강령과 같은 안전장치가 없이 전쟁 승리, 국가이익, 의학 발전이 인체실험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실험은 최악의 만행으로 귀결되었다. 헬싱키 선언과 뉘른베르크 강령은 참혹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과 성찰 위에 만들어진 인류의 대장전이다.
언론사 :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