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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하여

관리자 | 2008.12.15 21:41 | 조회 4791

[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2006. 5.19 (한겨레)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하여/도정일
여성들에게 ‘돈 벌어라’, ‘애 낳아라’ 거기에다 ‘잘 길러라’까지 하는 건 착취
저출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사회적 육아 지원체제의 확립

» 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1960년대를 건너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던 그 무렵 우리 사회의 구호 하나가 남아 있다. 당시 농촌지역에서는 그 ‘둘만 낳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앞에서 마을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반대 논리(?)는 크게 세 가지다. 아이들은 제 먹을 복 자기가 타고 난다(그러니 억지로 줄일 필요 없다), 인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므로 사람이 함부로 조절할 일 아니다, 자손이 많아야 집안이 번창한다.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농사에 매달려 있었던,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농업사회’였던 때의, 지금 돌아보면 호랑이 담배 먹고 장구 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 그 시골에는 아이들이 없고 도시 지역에서도 아이들은 줄고 있다. 농촌에는 아이를 낳을만한 젊은 부부들을 보기 어렵고 도시의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40년 만에 우리 사회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대에서 둘은 커녕 “하나도 키우기 힘들어”의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합계 출산율 1.08이라는 최근 통계는 기초 덧셈으로 따져도 계산이 맞지 않다. 남녀 두 개체가 결합해서 얻는 2세 개체의 수가 겨우 하나라면 그건 순수 재생산에도 못 미치는 1+1=1의 밑지는 장사다. 이런 저출산 경향에는 경제적 이유 말고도 40년간의 사회 변화에 따른 심리적, 문화적, 사회적 이유들이 있다. 남아를 통해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부계사회적 남성중심주의가 이완된 것은 사회문화적 요인이다. 아들을 바라고 줄줄이 낳다가 딸만 일곱 낳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요즘 좀체 들어보기 어렵다.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면 된다”로 젊은 세대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결혼이나 출산에 앞서 자기 실현욕구와 개인적 성취의식이 높아지고 ‘희생’의 의미가 절하된 것은 심리적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인생 경영이 상당한 독립성을 획득한 것도 중요한 사회적 변화다. 박사학위 쯤 가지고 고급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하게 되면 하는’ 정도의 일이지 만사 제쳐놓고 달려들 목적사업은 아니다. 결혼해서도 그들은 직장 때문에 남편과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사는 일이 흔하다. 그런 부부들은 애 낳을 틈도 없고 출산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많은 젊은이에게 결혼은 안정이 아닌 ‘두 사람의 지옥’

그 지옥 속으로 또 하나의 생명을 초대하라고?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들 중에서도 젊은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겁내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정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문제가 풀린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정말로 문제인가? 원인을 알아도 그 원인을 제거할 능력과 방법이 없으면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그 꼴이다. 우리 사회는 젊은 세대와 젊은 부부들을 떨게 하는 고용문제, 사교육비, 미래의 불투명성 같은 불안의 근원적 요인들을 제거할 능력이 있는가? 불안은 지금 우리 사회의 제1원인 같은 것이 되어 있다. 게다가, 문제의 원인을 알면서도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특징이다. 기업, 개인, 국가가 고도의 경쟁체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고 여겨지는 뜀박질의 시대에 경쟁과 여유, 긴장과 이완을 병합할 지혜, 자원, 방법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가?

뛰면서는 할 수 없는 게 아이 낳기, 아이 키우기

뛰면서는 할 수 없는 것이 아이 낳기다. 아이 키우기도 뜀박질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젊은 남녀들을 향해 “뛰어, 뛰지 않으면 죽어”라고 윽박지르면서 동시에 “아이도 낳아”라고 말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결혼하는 순간 이미 회사에서 ‘왕따’의 초기 단계로 들어서고 임신 4개 월 쯤이면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는 직장 여성들에게 아이 낳으라고? 요행으로 직장을 유지한다 해도 아이는 누가 키워? 사교육비는 어떻게 대고? 50대에, 빠르면 이미 40대 중반에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는 축복이 아니라 거대한 짐이다.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안정이 아니라 ‘두 사람의 지옥’이다. 그 지옥 속으로 또 하나의 생명을 초대하라고?

누구나 다 아는 이런 질문들을 새삼 던져보는 것은 출산율 저하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 그 원인을 제거해 나갈 능력, 의지, 방법이 없거나 태부족인 상태에서는 결코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출산 장려금 몇 푼 주는 식의 대책으로는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 미구에 닥칠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면서 당장의 경쟁력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을 기피해야 한다는 것은 개인 문제 아닌 구조적 모순이다. 아이 낳아 기르기가 지극히 어렵게 된 사회에서, 그 어려운 조건의 제거 없이 출산을 장려한다는 것은 정책의 모순이다. 여성들에게 돈 벌어라, 애 낳아라, 잘 길러라, 그래야 현모양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가부장제적 위선이고 착취다.


“돈 벌어라, 애 낳아라, 잘 길러라” 그래야 현모양처?

낯 두꺼운 가부장제적 위선이자 착취

이런 문제들은 물론 정부 혼자의 힘으로는 풀 수 없다. 정부 말고도 기업과 시장, 개인과 가족 등 사회 전체가 달려들어도 풀까 말까 싶은 것이 저출산 문제가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을 때 공적 자원을 동원하고 분배하고 유효한 수단을 강구하며 사회의 각 구성요소들로 하여금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일은 정부의 책임이다. 예를 들어, 출산 장려금보다 당장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탁아소, 어린이집, 어린이 도서관처럼 육아의 경비와 책임을 분담해주는 사회적 육아지원체제의 확립이다.

이런 작업은 단연 정부의 몫이다. 핀란드를 보면, 동네마다 민-관영의 탁아소가 있고 모든 시설이 무료다. 민영의 경우에도 운영비는 모두 국가가 부담해주기 때문이다. 민-관 어느 쪽 시설에 아이를 맡기는가는 부모가 선택한다. 어느 쪽으로 가도 시설과 서비스 수준은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무슨 공공의 서비스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볼 생각도 않고 “민간이 운영하는 곳은 국민 세금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민간시설들을 철저히 따돌리고 지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관의 태도다. 오갈 데 없는 동네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 공부방, 책방 역할을 해주고 있는 민영 작은 도서관 같은 데는 오랫동안 찬밥 신세다. 풀뿌리 민생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을 이처럼 냉대하고 우습게 아는 나라도 좀체 없다.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영역과 사영역이 지혜와 자원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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