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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 큰비 온다고 떨어지나

관리자 | 2008.12.15 21:47 | 조회 4581

세설] 흔들바위, 큰비 온다고 떨어지나/김선우 2006.8.3 한겨레

스스로 자리를 잡고 생명을 보존해온 것들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산사태로 토사 흘러내린 폐허 뒤에는 산을 뭉개고 대지를 혹사시킨 토건공화국의 과거가 있다

큰물 지나가 나라 안 여기저기 이재민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들이다. 상처난 곳 어디나 그렇지만 특히 내가 사는 강원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여러 날째 마음 언저리가 큰 돌을 얹은 듯 묵지근했다.

며칠 전 진부에서 시를 쓰며 교편을 잡고 있는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눈앞의 폐허를 바라보고 있자면 한숨부터 나온다며,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 중 벌써 세 명이나 대학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해마다 치솟는 대학등록금 앞에서 자진해 대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농부의 아이들, 그 마음에 패였을 멍울들을 어찌할까. 당장 급한 생필품을 지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수재지역 아이들이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아닐지,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길었던 장맛비 속에서 종종 두려운 마음이 일곤 했다. 몇 해 전 태풍 루사와 매미를 혹독하게 치렀던 강원도의 피해가 이번에도 특히 심한데, 주요 신문에서 터져 나온 동강댐 건설의 필요성에 관한 재론을 들으며 가슴이 철렁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대형 댐 건설로 수해를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을 여론 주도 매체에서 되풀이할 것인지 한심하고 암담한 마음이었다. 생태환경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유의 폭력성과 철학의 빈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코드이기 때문이다.

큰비건 큰눈이건 자체적인 균형을 찾아갈 수 있는 생명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순환될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류사는 말해주지 않는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위험한 강가에서도 인류문명의 시원들이 자라나왔듯이, 인간은 크고 작은 자연 재해를 받아들이며 스스로 길을 찾아온 존재다. 문제는, 길 찾기를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자연을 망쳐버린 오만의 극점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다. 대형 댐을 건설해 인간의 힘으로 물 조절을 하겠다는 이런 발상이야말로 지구를 이토록 피폐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다.

강원도 곳곳에 산사태가 나고 토사가 유출되어 마을이 묻히거나 잠기는 이 사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설악산 봉우리들에 가파르게 올라앉은 바위들이 큰비 온다고 굴러 떨어지던가. 벼랑에 뿌리내린 나무들이 가팔라서 산사태로 무너지던가. 생명의 힘으로 스스로 자기 자리를 앉히고 그 자리에서 생명을 보존해온 것들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산사태로 토사 흘러내린 폐허 뒤에는 반드시 인과가 있기 마련이다. 산을 뭉개고 깎고 뚫어버린 자리, 붉게 드러난 절개지들, 도로를 건설하고 펜션과 모텔을 지으며 대지를 혹사시킨 뒤끝에 폐허가 함께 오는 것이다. 강원도 골짝골짝은 물론이거니와 전국 어딜 가도 도로공사 중인 ‘토건공화국’의 부끄러운 현재가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오는가. 무절제한 건축으로 약해진 지반과 도로 건설을 위해 산을 잘라내고 철근을 박고 콘크리트를 덮어 인위적으로 끊어놓은 물길, 산길, 바람의 길들이 충돌하고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부작용의 총체가 오늘날과 같은 재해의 폐허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

호우로 인해 산사태가 난다는 건 산의 몸속에 스스로 감당할 물길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흐르던 개천을 막거나 틀어 도로나 농로를 놓은 곳들이 큰물 한번 지나가면 결국 5, 60년 전 흐르던 개천의 원래 물길로 돌아가 있더라는 얘기를 농촌 어른들께 종종 듣곤 한다. 자연은 그런 것이다.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숨쉬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지구인 것이다.

일제시대 쇠못을 박아 한반도의 기혈을 끊으려 한 일본제국주의 만행에 치떨 때가 있지만, 지금의 도로공사 현장들을 보면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쇠못보다 더한 거대한 철근 다리들을 박아 넣은 곳들에서 물길과 바람의 길들이 인공적으로 뒤틀리며 얽혀 괴로워하는 신음들이 들린다. 자연생태의 요람처럼 상징되는 강원도에 그간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돌이켜 보라. 사람의 고통만이 아니라 강원도의 자연이 나 좀 살려달라고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임을 함께 알아채야 할 때다. 그곳에 다시 철근 콘크리트를 쑤셔박고 포장해 대형 댐을 건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안전한 댐은 숲이다. 수많은 산들, 숲들을 깔아뭉개고 깎고 뚫으면서 끊임없는 도로공사에 혈안인 판국에 설상가상, 백 개의 살아있는 댐을 파괴해 하나의 거대한 죽은 댐을 만들려는 이 무지와 무모함에 대해 어찌 말해야 할까. 마음 아픈 것은, 자연재해 앞에서조차 빈익빈 부익부의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리조트를 만드느라 골재를 채취당해 지반이 약해진 산이 고통을 호소할 때, 리조트의 수익과 전혀 상관없이 농사짓고 살아가던 산골 마을이 재해의 당사자가 되기 십상이다. 자연을 훼손하며 진행되는 무차별한 도로건설과 건축 사업이 지속되는 한 천재를 가장한 인재는 끊임없을 부메랑이다. 그 부메랑이 가난한 낮은 지대의 삶터를 먼저 덮칠 확률이 높다는 슬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우리 옛사람들은 움을 돋아서 집을 앉혔다. 파헤치고 깎아서가 아니라 자연을 달래고 허락을 얻어서 인간의 삶터를 앉혔다는 얘기다. 산이, 물길이, 바람의 길이, 개펄을 잃은 바다가 아프다고 아프다고 하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는 간디의 말이 절박하게 아픈 날들이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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