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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명이다 숲을 지키자

관리자 | 2008.12.15 21:46 | 조회 5547

진교훈 교수의 생명칼럼 (2) 숲은 생명이다 숲을 지키자
2006. 4.23. 가톨릭신문
“숲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우리는 숲이 우리를 부르는 생명의 소리에 대해서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숲은 살려고 하는 생명의 한 가운데서 살려고 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서양과 동양의 숲

철학을 수학적 논리에만 의거하거나 윤리학을 인간관계로만 국한시켜 보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철학에서는 숲은 철학의 연구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양의 전통철학에서 숲에 관한 글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을 따로 따로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묵시적(默示的)으로 서술하는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숲에 대한 깊은 이해는 선비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숲과 인간의 불가불리의 관계를 깨닫고 요산요수(樂山樂水)를 할 줄 아는 것은 군자의 도리이다. 그래서 산수화는 동양화의 시작과 끝이며 군자의 정신수양의 거울과 같은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 즉 산과 물과 숲과 공기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바로 동양사상의 요체(要諦)이다. 산(땅)과 물과 숲은 상호작용과 상호협력을 하는 보완관계이며 공생관계이므로 그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가 잘못되면 다 같이 공멸한다. 인간은 땅과 물과 숲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땅과 물과 공기와 숲과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동시에 함께 공생하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숲은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개발(수탈)로 말미암아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환경윤리학의 등장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생태학적 위기와 이상기후를 겪으면서 비로소 근본적으로 숲의 의미와 숲과 인간과의 관계를 묻고 통찰하는 생태학적 윤리학, 즉 환경윤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숲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람이 숲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숲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숲은 애초부터 있어야만 할 존재이기 때문에 숲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숲을 보전하도록 위탁을 받았을 뿐이다. 숲은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숲의 본래적인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숲의 존재 이유

숲은 평화스러운 고요와 명상과 안식의 의의를 가르쳐 준다. 숲은 정신적 조건과 정서적인 충일을 형성한다. 숲속에서의 자연스러운 안식은 정신적 안정과 평화의 체험이다. 숲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준다. ‘비엔나 숲’에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악상(樂想)은 떠올랐으며 그리그와 시베리우스도 숲속에서 악상을 얻었다고 한다. 동양의 산수화와 시도 숲속에서 잉태되지 않았는가?

숲은 많은 시혜를 베풀어 준다. 숲은 맑은 공기를 내주어 생물로 하여금 숨을 쉬게 해주며, 탁한 공기를 맑은 공기로 정화시켜준다. 숲은 온갖 종류의 과일과 열매를 맺게 한다. 나뭇잎은 짐승의 음식이 되기도 하지만 잎은 떨어져 썩어서 대지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온갖 미생물을 살게 해주고 버섯을 자라게 해준다. 숲은 생물과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주며 물과 불을 베풀어 준다. 산림요법은 환자의 건강회복을 촉진시킨다.

수단이 아닌 목적

숲은 단순히 목재나 임산가공품처럼 매매대상이 되는 물건으로서 무엇을 만드는 재료나 상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숲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외경(畏敬)의 존재이다.

숲이 사라진 땅에서는 홍수가 나기 쉽고 홍수가 휩쓸고 난 땅은 죽은 불모지가 되고 만다. 북한에서 농산물증산을 위하여 숲을 남벌하고 소위 다단계식경작을 도모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식량증산을 이루었으나 숲이 사라진 후 북한의 농토는 황폐화되었다.

숲을 죽이는 짓은 결국은 대지와 공기와 물과 사람을 죽이는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숲을 지켜야한다.


진교훈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진교훈 교수의 생명칼럼 (2) 숲을 살리는 길
2006. 4.30. 가톨릭신문
“절제하는 살림살이만이…”

생명의 신비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인 숲의 신비도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숲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이 그 자체로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존중받아야 하듯이 숲도 그 자체로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직관을 통해 숲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숲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에 대해서처럼 숲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양심 성찰을 하지 않고 이해타산으로 산림보호를 시도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산림보호는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난날의 산림보호정책의 결과가 실증해준다. 숲을 자원으로만 보고 산림육성책을 시행해온 곳에서는 사람들은 얼마동안 숲으로부터 이익을 얻기도 했으나 종내에는 숲의 보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국제기관에서 굶주린 난민의 구제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이누가이는 그가 저술한 <인간의 대지>에서 국제기구의 정확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이를 입증하였고, 건(A.S.Gunn), 내스(A.Naess) 등도 이에 동조하는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해타산 산림보호는 실패

우리가 숲이라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우리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듯이 숲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비로소 숲은 잘 살 수 있다. 숲의 보전은 경제적인 동기를 넘어선 숲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경제제일주의에 오염된 현대인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숲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금기어(禁忌語)를 지어냈다. 예컨대 “큰 나무를 베는 사람은 쉬 죽는다”, “오래된 나무가 쓰러지면 흉사가 난다”, “ 나무를 많이 때면 산신령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등등.

그러나 현대의 교육은 숲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한 경쟁의 상업주의에 입각하여 반생태학적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생태학적 위기와 숲의 위기는 실상은 인간의 정신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생명가치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숲의 위기는 정신의 위기

요컨대 우리는 생명의 터전인 숲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숲의 존재론적 의미와 숲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 사람들을, 특히 청소년들을 가르쳐야 한다. 소극적으로는 정부가 무엇보다도 모리배의 농간에 휘말리어 숲을 죽이는 짓들, 예컨대 불요불급한 터널, 댐. 스키장, 골프장, 도로 등을 만든다든가 그밖에 녹지보호지역(그린필드 보호지역)을 풀거나 축소시키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국민들은 숲을 죽이는 짓, 예컨대 목제품의 남용과 인쇄용지의 낭비, 일회용 종이제품(종이컵, 종이접시, 종이로 된 티슈와 냅킨, 종이기저귀 등)과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이쑤시게 등을 가능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절제할 줄 아는 살림살이에서 우리를 살리고 숲을 살리고 생명을 존중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에 울창한 산림이 남벌되었고 이어서 한국동란전후의 경제사정악화로 말미암아 온 산이 벌거숭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승만 정권에서는 애림(愛林)정책을, 박정희 정권에서는 국토녹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고 온 국민이 이에 호응하여 우리나라는 산림녹화가 크게 성공한 모범국가로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숲의 소유권을 누가 가지고 있건 간에 숲은 만인을 위한 공공재화이다. 따라서 아무도 임의로 숲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나무를 심고 잘 기르고 숲을 지킬 의무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뿐이다. 우리는 맑은 물과 맑은 공기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숲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숲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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