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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성탄과 소통

관리자 | 2019.01.09 09:57 | 조회 2412



성탄(聖誕), 거룩한(聖) 탄생(誕)이다. 한 아기가 고향 집도 아닌 먼 타지에서 그것도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탄생을 거룩한 탄생이라고 부른다. 왜? 하느님 아들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을까. 우주만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주가 왜 한낱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을까. 성경은 사랑 때문이라고, 구원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 사람이 되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슈퍼맨을 보내어 세상의 모든 악을 쳐내거나, 말씀 한마디로 인간의 온갖 그릇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도 있으셨을 텐데, 왜 사람이 되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그것도 초라한 마구간에서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방법을 말이다. 

그 이유를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눈높이 사랑’ 또는 ‘소통’에서 찾아본다. 눈높이 사랑이란 사랑하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눈높이로 내려오는 것, 곧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참사랑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어 당신의 사랑을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셨을까.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소통하기 위해서다. 소통은 일방적이지 않다. 일방적인 것은 소통이 아니다. 지시이고, 명령이고 전달이다. 소통은 쌍방향이다. 상호적이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벽이 있고 등급이 있고 차별이 있어서다.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당신은 높은 사람이니까’ 하고, 못난 사람은 잘난 사람에게 ‘너는 잘났으니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벽을 깨고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꾸짖고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함께하기 위해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갓난아기로, 가장 초라하게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통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통을 하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소통은 참된 소통이 아니다. 공감대를 형성하면 목표 의식을 공유하게 될 뿐 아니라 공유하는 목표를 실현하려는 동력을 얻게 된다. 그 동력은 무엇보다도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활력이다. 소통한다지만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목표 의식을 공유할 수 없고 목표를 실현하려는 동력도 생기기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갓난아기로 가장 가난하고 초라하게 세상에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분의 생애는 이 소통의 방법과 목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또 모든 사람이 하느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더없이 존귀한 존재임을 일깨우고 공감하게 해주셨다. 

그래서 2000여 년 전 외양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난 한 아기의 탄생은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위대한 성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통의 성탄인 것이다. 


*위 칼럼은 가톨릭평화신문에서 발췌함을 밝힙니다.
언론사 :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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