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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엄마 시험 보고 올께… 열여덟 미혼모 은혜의 수능 도전기

관리자 | 2010.11.18 11:31 | 조회 5023

아가야 엄마 시험 보고 올께… 열여덟 미혼모 은혜의 수능 도전기

 
 

저는 태어난 지 41일 된 아기를 둔 열여덟 싱글맘입니다. 지난 봄 집을 나와 이곳에 왔습니다. 처음엔 한동안 우울했습니다. 뱃속 아기를 생각하면 힘을 내다가도 교복 입고 지나가는 친구들만 보면 눈물이 나왔습니다. 입덧이 유독 심해 하루 열 번씩 토했습니다. 그러기를 10개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러워질 무렵 저는 3.35㎏의 건강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가 탯줄을 목에 감고 있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습니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아기 덕분에 공부도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를 받아주는 대안학교에서 6개월간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삼칠일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사정을 봐주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저 이제 수능 보러 갑니다. 기도해주세요

은혜(가명·18)는 오늘 수능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보온병, 핫팩, 방석을 챙겼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아기 사진은 꼭 챙겨갔을 친구입니다. 녀석이 참 잘생겼어요. 배우 강동원 닮았다고 했더니 “정말요?”라며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은혜가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은 언어영역입니다. 어릴 적 아빠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며 도서관에 매일 데려가셨답니다.

은혜는 고 2때까지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중하위권이었다고 말하더군요. 그렇다고 잘 노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여고생이었죠. 다만 노래를 기차게 잘했습니다. 고등학교 축제 때 2년 연속 노래 대상을 거머쥔 이가 은혜랍니다. 인기가 많았지요. 주변 학교에도 소문이 나서 남고 학생들도 은혜를 보러 오곤 했습니다. 남자 친구 민수(가명·18)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됐습니다.

176㎝ 키에 말끔한 외모의 민수는 은혜의 마음을 금세 가져갔습니다. 순정만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니 소녀는 떨렸겠지요. 민수는 은혜를 참 많이 좋아했습니다. 은혜가 좋아하는 일은 뭐든지 했습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민수가 은혜의 말 한마디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니까요. 두 달 사귀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사고를 쳤습니다.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6∼7주가 흘렀습니다. 화장실에서 새어나온 외마디 비명. 아니 미처 새어나오지 못한 소리는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가 심장을 터뜨릴 것만 같았습니다. 약국에서 산 임신 테스터기는 빨간 줄을 그어 보였습니다. 곧 고 3이 되는 은혜에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한순간의 실수가 이렇게 될 줄이야. 곧바로 민수에게 알렸습니다. “애기 생명도 소중하고 (낙태하면) 네 몸도 많이 상할 텐데 우리 낳자”고 했답니다. 그땐 그랬다는군요.

부모님께 어떻게 알려야 할까요. 은혜는 고민 고민 끝에 장문의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왔습니다. 초음파 사진도 편지 옆에 올려놨습니다. 도저히 부모님의 눈을 보고 임신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은혜의 첫 가출입니다. 임신 3개월 때 집을 나와 4개월 때 민수와 함께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엄마 아빠를 볼 낯이 없었지만 더 이상 사실을 숨기고 집 밖을 떠돌 순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애써 담담해하셨습니다. 꾸짖기는커녕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며 은혜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은혜 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은혜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임산부 학생을 받아주는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은혜 부모님은 딸이 차가운 주위 시선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딸을 두리홈에 보냈습니다. 두리홈은 구세군이 운영하는 미혼모자 시설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혼모 시설인데 입양모(입양 보내는 엄마)보다 양육모(직접 양육하겠다는 엄마)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두리홈에 가니 또래 친구들이 서른 명. 은혜처럼 배가 불러오는 친구부터 이미 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 입양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까지 다양합니다. 그나마 은혜는 사정이 나았습니다. 고아였거나 조손 가정에서 자랐거나 성폭행을 당했거나 등등 말 못할 사연에 가슴앓이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이 오히려 은혜를 위로해줬습니다. 친구들은 아기를 위해 기도했고, 직장을 알아봤고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육군장교가 된 언니도 있고, 세무회계 전문가가 된 언니도 있고, 미용사, 간호조무사, 카페 바리스타가 된 언니도 있다고 하더군요. 은혜도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임신 6개월째. 은혜를 신림동의 한 대안학교에서 받아줬습니다. 뛸 뜻이 기뻤습니다. 무엇보다 올해 수능시험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수업은 성인반에서 어른들과 함께 들었습니다. 엄마뻘 되는 반 친구(?)들은 은혜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은혜는 아기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습니다. “공부하는 게 태교에 최고라고 그러시더라고요(웃음).” 희한하게 아기만 생각하면 행복해졌습니다. 집중도 잘 됐고요. 은혜는 내신 1등급을 받았습니다.

은혜는 CCM가수가 되는 게 꿈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CCM가수는 소향. 좋아하는 CCM은 ‘마커스’의 ‘부르신 곳에서’입니다. 은혜가 가고 싶은 대학은 기독교 대학입니다. 신학교면 더 좋겠다고 했습니다. “CCM가수가 돼서 하나님을 하나님을…평생…찬양하고 싶어요….”

민수와는 해피 엔딩이 될지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어린 민수에게도 아빠가 된다는 건 벅찬 일이겠지요. 은혜에겐 산후우울증이 감기처럼 왔습니다. 산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입니다. 출산 후 몸이 회복되지도 않은 데다가 2∼3시간마다 젖을 물리느라 잠을 설치다 보면 괜스레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이 유독 절실한 시기이지요. 그런데 은혜는 왠지 민수가 멀어지는 걸 느낍니다. 연락도 뜸해지는 것 같고요. 연기자가 꿈인 민수는 이미 수시로 4년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아직은 “아빠라고 불러”라며 아빠 노릇을 하려는 기특한 민수입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캠퍼스 낭만도 만끽하고 싶겠지요.

은혜는 아기의 이름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습니다. 아기 성이 ‘박’씨인 이유입니다. 한부모 가정 신청도 곧 한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은혜가 원하는 학교 학과에 꼭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내 은혜야.

글 이경선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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