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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던 남편 살리고, 투병 중인 나를 일으키는 ‘사랑의 힘’ (21.02.07)

관리자 | 2021.02.04 18:23 | 조회 1792

죽어가던 남편 살리고, 투병 중인 나를 일으키는 ‘사랑의 힘’

세계 병자의 날에 만난 사람 류정호 테레로사


▲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남편에게 신장을 이식해준 류정호씨. 이식한 지 6개월 후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가 생명에 대한 찬가를 담은 「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콩팥을 주었다」를 펴냈다.








“세상의 어느 부부가 아파 죽을 지경인 배우자를 그냥 둘 수 있겠어요? 죽어가는 배우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다 해봐야지요. 결혼생활에 어찌 좋은 날만 있었을까마는, 35년간 함께해온 세월이 부부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남자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가 지어진 ‘창세기’가 성경에 있다면, 여자의 콩팥 하나로 남자의 생명을 살려낸 ‘신(新) 창세기’를 몸으로 쓴 여성이 있다. 꽃과 문학을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해온 류정호(테레로사, 66)씨.

지난해 4월 22일, 그의 몸에 있던 콩팥 두 개 중 하나가 남편에게 건너갔다.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남편의 신장 이식 공여자가 됐다. 부부로 살아온 35년 세월 중 가장 큰 이벤트였다. 남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숭고한 사명감, 두려움도 없었다. 이식 수술을 위한 교차반응 검사와 혈액형 일치 검사에서 ‘적합’ 판정을 받고, 신께 납작 엎드렸다. 이것만큼은 인간이 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콩팥이 두 개인 것에 감사하며, ‘내가 가진 것 하나로 남편이 건강해진다면’ 그 생각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뇨병, 대장암으로 오랜 시간 처진 남편의 어깨를 다시 세우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콩팥 하나로 남편이 건강해진다면

다도(茶道) 전문가로 차향을 만끽하며 강의와 저술활동을 해온 그는 바쁜 일상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남편과 한 몸인 부부로서, 배우자의 고통을 방관할 수 없었다. 남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병상 한쪽 구석에서 조각 글을 썼다. 차향 대신 병실의 약품 냄새와 투석기 돌아가는 소리, 아픈 이들의 신음을 마주해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라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들의 쓸쓸하고 찬란한 풍경이었다.

그가 써온 조각 글들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넘어 고통을 받아들이는 이타적인 헌신, 생명에 대한 참뜻이 담겨 큰 울림을 줬다. 그의 글을 본 출판사에서 바로 출간 제의가 들어왔고 지난해 10월 중순 출판사에 에필로그만 빼고 원고를 모두 넘겼다. 남편에게 신장을 이식해준 지 6개월 후였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편에게 신장을 줄 때 의기양양했어요. 저는 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남편에게 신장을 주면서 남들에게 칭송받고…. 하늘에 계신 분이 엄청난 핵폭탄을 던지셔서 저를 깨우치게 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편을 위해 헌신한다고 잔망스럽게 투덜거리던 날들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주셨어요. 겸손이 모자란 것에 성숙하게 살라고 고난을 주셨어요. 몸살 정도로 지나갔으면 저는 계속 자만했을 텐데…. 면역력을 제대로 떨어뜨리셔서 남편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하시는 거 같아요.”

하느님이 그에게 던진 핵폭탄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다.

“몸에 암세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암이라니…. 백혈병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에 걸리다니….”

백혈병 진단을 받은 날, 류씨는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통곡했다.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통곡하는 아내의 등을 쓸어주면서 “내가 죄인”이라고 말했다. 류씨는 죽음을 생각했다. 눈앞에 장례 미사도 어른거렸다. 두 아들에게 유언을 전하고, 며느리에게 영정사진도 건넸다. 남편은 아내의 간병인이 되어 주었다. 의사는 신장 이식과 백혈병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했다.

올해 1월 발간된 「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콩팥을 주었다」(파람북)는 여느 동화책의 아름다운 결말처럼 ‘고생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지만, 백혈병 투병이라는 또 다른 서막을 알렸다. 에필로그는 눈물 없이 쓸 수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맞바뀐 자리에는 사랑과 헌신도 방향을 틀었다. 그의 투병소식이 전해지면서 기도와 응원이 빗발치고 있다. 적혈구와 혈소판을 수혈받아야 하는 그에게 지정헌혈이 쏟아지다 못해 남아서 부족한 옆 병실 환우와도 나눴다. 하루가 멀다하고 현관 앞에 미역국이며 나물 반찬을 놓아두고 가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매일 밤 9시마다 류씨를 위한 9일 기도를 해주는 이들도 있다. 류씨의 치유를 기원하며 달리기를 시작한 후배도 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랑의 힘이라는 걸 절절하게 느낍니다. 하느님이 이번에는 무얼 겪게 하시려고…. 저를 도와주는 이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여러 방법으로 드러나시는구나 생각했죠.”


▲ “저희 집 마당에 오랜 목련나무가 있어요. 지난 주에 내린 폭설로 목련의 꽃눈이 옴짝달싹 못하더니 어제 내린 비에 묵은 털옷을 화르르 털어내더군요. ‘그래, 내게 닥친 곤란과 병도 곧 나을 거야. 봄이 오고 있으니….’ 봄을 부르는 빗방울에 묵은 털옷을 털어내고 가뿐해진 목련 꽃 눈에 다시 희망을 가졌습니다.” 류정호씨가 보내온 목련 사진과 카톡 메시지.



사랑의 힘, 이타적 헌신을 믿는 당신들에게

류씨는 가톨릭대 생명대학원 졸업생이다.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생명사목연구회와 가톨릭대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생명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자나 깨나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왔어요. 대학원에서는 이론을 공부하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생명 의식이라는 것이 천천히 배어들었어요. 생명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명은 ○○이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어떤 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잘 내리게 되는 거죠.”

처음 류씨의 글을 보고 책으로 출간하게끔 마중물이 되어 준 남편의 주치의 보라매병원 이정표 교수는 신장병을 앓는 환우와 가족들이 읽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부부들을 위해 썼다. 그의 책을 읽은 후배 한 명이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는 말에 류씨는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카락이 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농담을 건넸다.

책 에필로그에는 그가 잠결에 들었던 음성을 남겼다.

“사랑이란 게 뭔가. 상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아보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는 게 사랑의 시작 아니겠나. 자네들이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즐겨 쓰더군.(중략) 내가 그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젖은 눈시울을, 아픈 사람의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 가쁜 호흡을, 아픈 사람의 상처와 흉터를 살피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을 갖는다는 거야. 훗날, 산들바람 불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향기로운 들꽃에 감싸인 이 동산에 오를 때, 아픈 사람을 볼 줄 아는 눈과 아픈 사람을 품는 따뜻한 가슴이면 좋겠어. 누구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삶의 모든 길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마시게…. 맞잡고 걸어온 자네 부부에게 축복을 보내네. 고맙네.”(에필로그 중에서)

책 첫 장에는 ‘사랑의 힘과 생명의 숭고함, 이타적 헌신의 미덕을 믿는 당신의 손 위에’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사랑의 힘과 생명의 숭고함, 이타적 헌신의 미덕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내음이 문장 속에 피어난다. 사랑과 헌신의 삶으로 피워낸 부부 사랑의 결정체를 만날 수 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추천사에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무한한 신뢰, 고통을 받아들이고 신을 마주하는 겸허한 자세가 감동의 빛을 발한다”고 썼다.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도 추천했다. “저자의 웅숭깊고 정갈한 성품과 글의 진정성으로 인하여 읽는 내내 따뜻하고 행복했다”고.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언론사 :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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