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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가는 신생아실, 간판내리는 산부인과

관리자 | 2008.12.15 21:50 | 조회 4691

비어가는 신생아실, 간판내리는 산부인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병원은 지난해 산부인과 간판을 내리고, 비만체형관리 전문의원으로 탈바꿈했다. 하루에 분만 환자가 1~2명에 불과해 병원이 운영될 수 없어 내린 고육책이었다. 이 병원 원장은 “강남의 산부인과 의사 중 절반 이상이 전공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법에 의사면허만 있으면 전문과목에 상관없이 진료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경기 수원의 한 50대 산부인과 의사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병원을 접고 아예 다른 병원에 고용의사로 취업했다. 그는 “한 달에 500만원도 수입이 안돼 임대료와 간호사 월급을 주고 나면 적자”라며 “분만과 산전진찰이 전부인데 분만 수가 너무 적어, 적게 벌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 취업했다”고 씁쓰레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최근 소아병동을 새로 지으려다 포기했다. 지금과 같은 낮은 출산율이라면 거액을 들여 소아병동을 지어도 잘 운영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 지방 도시에서는 아예 분만실을 폐쇄하는 산부인과 병원도 많다. 신생아도 줄어든 데다 출산을 돕다 자칫 의료사고라도 일어나면 수익보다 피해가 더 크다는 판단이다.

◆“먹고 살기 힘든데 누가 가겠나”

‘아이 안 낳는 사회’가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제는 아예 의사들이 산부인과 전공을 기피하고 있다. ‘손님’이 줄어들어 먹고 살기 힘들어질 게 뻔한데 누가 힘든 길을 가겠냐는 것이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이 대표사례다.

산부인과 전공의(레지던트 1년차) 8명 모집에 5명만 지원했다. 작년까지는 6명 모집에 6명이 지원해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올해 처음으로 미달사태가 빚어졌다. 병원 관계자는 “대형 병원조차 산부인과 전공의가 미달된 것은 충격”이라고 말했다.

전공의는 의대를 졸업해 수련의(인턴) 1년을 거친 의사로, 전공과목을 결정한 뒤 병원에서 3~4년간 수련하게 된다. 올해 2명의 산부인과 전공의를 모집하려던 가천의대 인천 길병원에는 지원자가 하나도 없어 모집에 실패했다. 작년에 이어 2년째다.

반면 산부인과 교수는 14명이나 된다. 내년이면 산부인과 수련을 받는 전공의가 5명으로 줄어, 교수 3명에 1명의 전공의가 배정되는 기이한 현실이 된다. 전국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는 산부인과 의사 전공의를 모집한 결과, 184명 정원에 절반도 못 미치는 91명만 응시했다고 6일 밝혔다. 지원자를 모두 합격(49.5%)시켜도 전체 정원의 절반도 못 채울 사상 최악의 상황이다. 2002년부터 정원 미달이 시작돼 6년째 이어지고 있다.


◆대학병원도 분만 하루 1건

가장 시급한 것은 진료 차질이 우려되는 점이다. 올해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자가 전무한 국립의료원에는 전공의 1명만 있어, 전공의들이 하는 응급실 당직을 산부인과 전문의사 3명과 함께 순번제로 근무하고 있다. 전공의들의 업무 부담이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성의 있는 진료를 기대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일부 병원에선 격무에 지친 전공의가 그만두면 남은 의사들에게 부담이 넘어가 사직(辭職)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산부인과를 기피하는 현상은 신생아 수가 급감해 수입이 떨어진 것이 주 원인이다. 신생아 수는 2000년 63만여명에서 작년에 43만여명으로 6년간 무려 20만여명이 줄어들었다. 신생아를 하루 1명 정도만 받는 종합병원들도 늘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작년 상반기 6개월 동안 인제대 부산백병원, 경북대병원, 고려대 부속병원, 동아대병원 등은 하루에 1건 정도의 분만이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 의료사고 소송이 많은 점도 산부인과 기피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에 따르면 2598건 의료사고 상담건수 중 산부인과가 400건으로 무려 15.4%나 차지했다.

최영렬 산부인과의사회장은 “한 달에 최소 17건 정도 분만실적이 있어야만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는데, 그 이하인 곳이 너무 많다”며 “특히 분만사고를 한번이라도 겪은 의사들은 다른 과로 전업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원수는 2002년 1938곳에서 올해는 1862곳으로 4년 만에 76곳이나 사라졌다.

이에 대해 박윤형 순천향의대 교수는 “산부인과는 24시간 응급 대기해야 하고, 응급분만의 속성상 의료사고 위험이 큰 대표적인 의료계 3D업종”이라며 “분만료 등 보험수가를 높여주고, 의료사고에 대비한 의사 보호장치 등을 만들어주는 등 의료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2006. 12.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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