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과학기술만능주의

관리자 | 2008.12.15 23:35 | 조회 1504

▲ 이 동 익 신부(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장)

과학기술만능주의


고귀한 인간 생명은 그 자체로 목적…어떤 경우에도 도구화는 절대 안돼

영국 '치료용 맞춤아기' 출산 허용
인간 존엄성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 황폐화 우려

최근 생명공학계가 떠들썩하다. 영국이 동물의 생식 세포와 인간의 DNA를 결합시킨 이종간 핵이식 연구를 허용한 데 이어 '치료용 맞춤아기' 출산을 허용한 것이다.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시험관 수정을 통해 아픈 자녀와 조직이 일치하는 배아를 만들어 선택적으로 착상시켜 치료용 맞춤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맞춤 아기는 이미 태어난 형제, 자매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는 '구세주 형제'가 되는 셈이다.

'인간' 종 자체 변형ㆍ붕괴 우려

 영국에서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생명공학계가 떠들썩한 것은 그러한 연구 과정에 변형된 유전자가 유출되거나 혹시 악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에 심각한 변형이 생기거나 아예 붕괴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생명공학계뿐만 아니라 생명윤리 차원에서도 염려는 크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대체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작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인간생활의 구조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동 자체의 구조가 변화했고, 노동 분야에서 과학적, 기술적 진보가 크게 이뤄지면서 노동은 인간 실존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인간 노동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은 커져갔고, 20세기 초에는 신학분야 안에서 노동신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히 전개되기도 한다.
 노동신학의 핵심은 이렇다. 곧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며,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 인간 노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노동이 인간 자신을 발전시키고, 하느님의 창조활동을 완성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노동의 참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본권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과학기술주의가 노동신학의 기초를 가장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이며, 이 창조사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모든 것, 즉 지성과 창조력, 온갖 노력을 쏟아 붓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기술의 발전은 하느님 창조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허구적인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돼버리고 말았다.

과학기술이 인간 지배하는 세상

 그들은 희귀병 치료법이 아직 없는 현실에서 그 누구라도 그 연구에 뛰어들어 특허를 선점하는 것이 국익 차원에서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중차대한 과제에 대해 윤리적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생물학적 재료로 삼아, 설령 그러한 일들이 어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물질적 부를 불릴 수만 있다면 윤리적 문제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과학기술만능주의의 표본이 아닐까.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과학 기술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의 일상적 삶에 쉽게 적용되면서 일반 시민 사회의 윤리의식을 매우 빠른 속도로 오염시키고 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해도 된다" "과학의 도움으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수단과 방법은 문제되지 않고, 무엇이든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극단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오직 과학 기술만 필요한 것이 되고, 인간의 존재론적, 윤리적 지평은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한에서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그 위세를 떨쳐가는 생명공학의 발전이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될 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크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주의적 사고는 결국 모든 윤리문제에 있어서 개인의 극단적 자유, 심지어는 과학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그릇된 자유까지도 인정하게 되는 극단주의를 초래할 것이고, 나아가 일종의 우상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08. 07. 20 [9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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