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1) 삶의 질

관리자 | 2008.12.15 23:33 | 조회 1353

이동익 신부님 (가톨릭 대학교 생명대학원장) 평화신문 5월25일 971호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1) 삶의 질"


인간 생명은 현존 그 자체로 존엄


평화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생명대학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와 함께 생명의 문화 건설을 위한 공동기획을 마련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화가 꽃피는, 하느님 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기획한 이 난은 두 기관에 속한 전문가들이 돌아가면서 집필합니다.


'삶의 질'

생명윤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들 중 하나는 '삶의 질' 개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양의 사회. 경제적 발전 과정에서 비롯된 '삶의 질'이라는 용어가 서서히 생명을 다루는 의료 분야로 그 영역을 넓혀갔고, 인간 생명의 영역에서 윤리의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날 때, 그러한 문제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까지 삶의 질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이미 삶의 질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삶', '행복한 삶', '즐거운 삶', '가치 있는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버렸다. 이러한 기준은 우리 사회를 결국 의식 없이 누워있는 식물 상태의 환자, 에이즈 환자, 기형의 태아, 장애인들의 삶을 가치 없는 삶을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분류하는 사회로 변질시켜 버린 측면이 있다.
삶의 질이란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한 인간의 만족스럽거나 혹은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언급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높은 삶의 질이란 삶을 만족시키고, 삶에 있어서 고통스럽거나 비참한 상태를 제거하는 데에 목표를 둔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그 나라의 보건 정책은 국민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가적 급부들을 제공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배려해 줌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 적극 재원을 할당해야 한다.

생명에 순위 매겨서는 안돼

그런데 여기서 삶의 질 개념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삶의 질의 주관적 차원을 너무 강조하면 일종의 상대주의에 빠져 결국 모든 객관적 평가를 전적으로 부인하게 될 위험도 함께 도사리게 된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삶의 질의 주관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특정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을 측정하여 이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
엔겔하르트 (H.T. Engelhardt)는 이러한 능력들을 뇌 기능, 자기 인식, 온전한 합리성이라고 설명했다. 플레처(J. Flettcher)는 삶의 질이란 적어도 최소한의 지적 능력과 자기 인식, 자기 통제, 시간 감각, 관계 능력,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 의사소통능력, 교환 능력, 이성과 감정의 균형, 대뇌피질 기능을 지닌 인간 생명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존의 심오한 차원 무시 경고

인간의 인간다운 능력은 무엇이 돼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하고 공통된 관점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필요가 있는 만큼, 삶의 질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그런 능력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 생명도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러한 생명도 보호하고 보살필 의무가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선을 향유하고 행복에 이르는 정도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든, 또는 전형적인 인간의 활동과 능력을 보이는 정도에 따라 평가하든, 이러한 삶의 질 범주는 결국 인간의 가장 심오한 존재론적, 비공리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질적인 구분으로 생명의 순위를 결정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삶의 질이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될 때 인간 상호간의 영적, 종교적 차원과 같은 실존의 더 심오한 차원들은 무시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한 주체의 행동이나 표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존 자체,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있다. 젊든 나이가 들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배아든 신생아든, 똑똑하든 어리석든,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는 그 수행 능력이나 삶의 질과는 무관하며,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강조되는 삶의 질 논의가 약한 생명을 거부하는 논의로까지 확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평화신문 2008년 5월25일 제9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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