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죽음과 고통은 꼭 피해야할 악인가

관리자 | 2008.12.15 23:37 | 조회 1559

▲ 박 정 우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생명의 문화] 죽음과 고통은 꼭 피해야할 악인가 "


집착ㆍ이기심에 희생되는 생명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실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보통 상실, 고통, 이별과 같은 부정적 경험을 동반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음은 단지 피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완결하고 하느님께로 가는 순간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죽음을 잘 맞기 위해 죽음의 의미를 영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세상에서 사는 동안 생명을 주신 창조주 뜻을 잘 살피며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결여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명을 훼손하는 두 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죽음 역시 겸허히 받아들여야할 인간 실존의 현상임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무고한 인간 생명인 '배아'를 실험도구로 사용하고 파괴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품위있는 죽음'이라는 미명으로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안락사다. 두 가지 모두 참된 생명의 의미를 훼손하는 비윤리적 행동이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불임치료 후 남은 냉동배아 혹은 체세포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배아를 사용하는데, 이 배아들도 46개의 고유한 인간 염색체를 지니고 있으며, 엄마의 자궁에서 자라면 독립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분명한 인간 생명이다.

 이 배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 생명으로서 보호받아야 함에도 불치병 치료제를 만든다는 미명으로 실험실의 재료로 사용된 후 파괴된다. 과연 누가 다른 인간 생명을 죽여가면서 만드는 치료제로 자신의 현세의 삶을 연장해야 할 만큼 특별한 존재일수 있을까? 설사 배아를 이용한 치료제를 사용해 불치병을 고친다고 해서 현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마치 소풍처럼 잠시 왔다가 본래의 집인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인데, 잠시 머무르는 현세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또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죄'를 짓고 나서 결국은 맞게 되는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아닐까? 그 때 우리의 현세 삶에 대한 심판관으로 대면하게 될 하느님께서는 다른 인간 생명을 파괴한 것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종종 가톨릭 신자조차 배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한 청년이 자신의 부모님이 불치병에 걸리면 자신은 배아를 이용한 치료제를 사용해서라도 부모님을 살리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 자기 부모님의 병을 고치겠다는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기뻐하실까?

 안락사의 경우 역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한 죽음을 맞게 도와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말기 환자에게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을 중단하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사 고통의 감소를 위한 이유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인간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이다. 물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 진통제를 사용해 고통을 경감시켜줘야 하겠지만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일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더구나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하며 영적 체험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진정한 의미의 품위있는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는 일은 인위적 생명단축이 아니라 호스피스 활동이 보여주듯이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할 수 있도록 환자를 격려해주고 성사와 기도를 통한 영적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다.

 어떤 말기환자들은 고통과 싸우면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죽음이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친지와 친구들을 불러 그동안 고마웠노라고 미안했노라고 사랑했노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떠난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바로 이런 모습이 품위있는 죽음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 고통은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부해야 할 절대악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고 완성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주신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죽음과 고통을 신앙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우리의 현세 생명은 더 풍요롭게 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평화신문] 2008. 11. 16 994호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