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죽음

관리자 | 2009.09.25 10:33 | 조회 1473

"[생명의 문화] 죽음"


죽음 사랑해야 삶도 아름답다.


▲ 신승환 교수(가톨릭대 철학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살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은 죽음으로 종말에 이르며, 시시각각 죽음이라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큰 적이다. 그러나 생명이 생명인 것은 바로 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죽음을 자신의 근본 조건으로 지닌 숙명적 존재가 바로 생명인 것이다.

 생명을 둘러싼 이 역설, 죽음과 생명이란 두 개의 얼굴이 실은 한 몸이며,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역설과 모순,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자리하고 있다. 죽음에 의해 이해되는 생명, 죽음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나는 생명, 죽음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생명의 숙명은 인간에게 존재론적 성찰과 초월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대답하고 있는 창세기에서도 제일 먼저 인간의 죽음과 그에 따른 존재의 문제에 대해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죽음은 원초적인 악, 원죄라 불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많은 경우 죽음은 피해야 할 것, 나쁜 것이거나 생명을 해치는, 생명의 가장 큰 원수로 간주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란 말씀은 이러한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이긴, 구원의 결정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죽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사건은 애초에 불가능하게 된다. 죽음은 역설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하느님과 존재론적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래서 어쩌면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코헬 7,1)고 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생명의 위협이지만 반대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게 되며, 죽음에의 성찰을 통해 생명과 삶의 의미가 온전하게 드러나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철학자 E. 프롬은 인간 존재를 구별하는 결정적 기준을 죽음에의 태도에서 찾고 있다. "죽음을 사랑하는 자와 삶을 사랑하는 자의 구별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보듯 생명에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사건인 죽음에 대한 태도가 결국 삶을 결정하고 삶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삶은 죽음에의 이해와 그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다르게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죽음에서부터 삶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것, 죽음을 거부하고 마치 죽지 않을 듯이 살아가는 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태도는 생명을 생명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 행위가 된다. 그것이 근원적인 이유가 되는 것은 미래의 사건인 죽음을 이해하고 결정하는 지금의 태도가 거꾸로 내일의 삶을 방향짓고 그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필연적 사건인 죽음은 삶을 철저히 무로 돌린다. 이 절대적 무지와 철저한 무화(無化)의 힘 때문에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다. 죽음에 대해 인간은 철저히, 절대적으로 무지하다. 이 절대적 무지와 무화가 죽음에의 두려움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의 이해와 성찰, 그를 통한 죽음에의 태도 결정이 오히려 죽음에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준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일어날 죽음을 앞당겨 지금 여기서 현재의 사건으로 성찰하는 행동은 죽음을 현재로 가져오는 초월적 행위이다. 이러한 죽음의 현재화는 생명의 근본태도이며, 생명이 생명으로 의미를 지니기 위한 결정적 자세가 된다. 죽음의 현재화, 죽음의 의미에 대한 현재의 태도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다.
 
 죽음을 이기는 인간학적 자세는 죽음을 현재화하여 성찰하고, 죽음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지금의 초월적 결단에 자리한다. 그럴 때 죽음은 삶을 풍성하게 하고 삶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죽음을 현재화하고 결단하는 행위에서 우리는 생명을 생명으로 지킬 수 있다. 생명에의 존중은 죽음의 현재화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신문]    2009. 08. 30    10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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