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모든 순간은 존중돼야 한다

관리자 | 2009.09.10 11:27 | 조회 1457
 

 

"[생명의 문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모든 순간은 존중돼야 한다"


말하는 대로 생각한다, 잉여 식물인간 등 인간 존엄성 해치는 명칭 사용해선 안돼


   진교훈(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은, 한 순간 어떤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중환자실의 중환자는 얼핏 보면 마치 기계인 것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그것은 제3자 눈에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중환자에게는 그런 저런 기계장치와 수많은 정맥주사 줄들이 생명 줄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자신을 살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기도 하는 고마운 장치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호흡을 하건, 심폐소생술을 받건, 그 밖에 신진대사를 어떤 방법으로 하건, 그런 것들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겉으로 좋아 보이지 않더라도, 이를 인간의 존엄과 결부시켜 말하는 것은 환자의 인격을 훼손하는 부당한 말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을 '존엄사'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사실상 '소극적 안락사'를 미화시키는, 생명을 죽이는 비윤리적인 말인데도, 사람들은 '존엄하게 죽는다'는 말에 현혹되고 있다.
 기계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마치 인간의 품위를 지켜주는 것처럼 오도되기도 한다. 많은 환자들이 기계장치의 힘으로 살 수 있으며, 또 살아가고 있다.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기계사용유무와 인간의 존엄은 무관한 것이다.
 "개념이 관념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는 명칭 사용에 신중해야 하며, 특히 인간의 호칭이나 명칭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때 체외수정을 하고 남는 배아를 '잉여배아'라고 부른 적이 있다.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듯이. '잉여배아'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가 생명윤리기본법안을 정부에서 제정할 때, '잉여배아'라는 말 대신에 '잔여배아'라고 부르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다행히 학계에서도 잔여배아라는 말을 받아들여 사용했다. 그러나 이 표현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애당초에 체외수정이 허용되지 않았다면, 이런 듣기 거북한 말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근 언론을 비롯해 식물상태(vegetative state)의 환자를 '식물인간'이라고 함부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환자가 식물처럼 의식이 없어 보이고, 겨우 신진대사만을 하는 경우에, 식물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식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식물의 생명파괴를 쉽게 자행하듯이,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 특히 식물상태의 환자나, 고비용이 드는 환자의 생명을, 식물처럼 취급하려고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식물상태의 인간을 안락사라든가, 심지어 존엄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교묘하게 파괴하려고 획책한다.
 인간을 식물 또는 짐승과 같은 위상에 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라 메뜨리(de La Mettrie)처럼 '사람을 기계'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잘못된 말을 함부로 사용하다 보면, 그런 말이 씨가 되어, 인간 존엄성을 쉽게 파괴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차별하거나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수술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사선을 넘고 병실로 옮겨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우라는 말이 정겹게 다가온다.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건, 나이가 얼마이건, 어떤 모습을 보이건, 환의를 입은 사람끼리는 친구다. 그들은 그 불편한 몸으로도 할 수만 있으면 서로 도우려고 한다.
 최근에 장애자 또는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에 장애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난다. 인간이라는 말 앞에 차별을 느끼게 하는 말을 붙이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옳은 것이다.
 그 누구도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임의로 선택할 수 없고,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절대적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며, 그 분 안에서 모든 인간은 숨쉬고 살 뿐이다. 인간은 수정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태에 있건, 모든 인간 생명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려는 것이 회칙 「생명의 복음」의 핵심이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이런 고통이 주어지는 것인가'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나에게 주어진 삶과 고통을 감수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다. 1분 1초, 모든 순간의 삶이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이며 은총임을 사선(死線)을 넘어본 사람은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병자성사는 감사와 기도가 신앙의 핵심임을 깨닫게 해주는 절호의 기회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이 항상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할 수 있도록 위로해 준다. 그래서 병은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신문]    2009. 08. 02      10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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