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생명의 문화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관리자 | 2011.07.19 13:47 | 조회 1312

[생명의 문화]생명의 문화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구인회 교수(가톨릭대 생명대학원)


얼마 전 여린 목소리의 한 여학생 전화를 받았다. 그 학생은 교회에서 틴스타를 통해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을 실시하듯이, 왕따와 학교폭력 등으로 자살의 위험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자살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중고등 학교에서 교육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로 도와주는 친구가 돼줘도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데 집단적으로 어떤 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생명윤리, 생명의 문화는 결국 삶의 문제와 불가분 연결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지배적인 가치관, 그들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생명 문화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그에 대처하는 방법 또한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면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모두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지만, 어떤 이에게는 좀 빨리, 어떤 이에게는 좀 늦게 닥치는 것일 뿐이다.

 타인의 죽음만을 바라보다가, 막상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어느 날 죽음이 찾아와 자신 앞에 우뚝 서면, 저항하거나 피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단단한 벽으로 막아 놓아도 모든 것을 뚫고 나타나는 죽음을 피해 숨을 곳은 없다. 죽음에 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무섭고 야속한 죽음만이 현실이 되며, 그 외 모든 것은 가치를 잃고 만다. 죽음 앞에 홀로 선 인간은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 절대 고독,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혹함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죽음이 당장이라도 현실화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인생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인식할 뿐이다.

 죽음 앞의 처절한 절대 고독은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하게 만든다. 죽음에 임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 가진 것도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며, 모두가 평등하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은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절대고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죽음이 자신의 승진에 미치는 영향부터 계산하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다. 심지어 이반 일리치의 아내는 장례미사에 조문객으로 온 남편의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남편의 죽음을 근거로 국가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이처럼 소설은 인간의 냉정함과 비속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분노하지만, 결국 그들도 가련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용서하며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종을 맞는다.

 현대 도시인들 대부분은 타인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중한다. 그렇게 서로가 고립되어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않으며,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아는 사람조차 때론 못본 체 외면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은 어떠한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이웃을, 학교 친구를, 직장 동료를, 교우를, 형제를, 부모를, 자식을 어떤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문제에 얼마만큼 함께 하고 있는가?

 죽음이나 고통은 비록 현재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것으로 안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느 순간이든 바로 자신의 문제로 다가와 앞에 우뚝 설 수도 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예외가 될 수 없음은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겪을 때는 홀로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보고 분노에 싸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역시 형태는 다르나 각자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연민의 정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과 무상을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 가운데서도 마음만은 함께 하고 있음을 전할 수는 있다.

 

평화신문  2010. 11. 28 [1094호]

 

☞ 기사원문 바로가기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