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의 문화] 배아의 정의(定義)와 생명윤리법

관리자 | 2010.10.18 13:41 | 조회 1570

[생명의 문화] 배아의 정의(定義)와 생명윤리법

 

평화신문 [1087호][2010.10.10]

 

우재명 신부(서강대 신학대원원 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사회에서 올바른 이름이나 용어 사용은 중요하다. 이름이나 용어는 한 존재의 정체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독일에서 언어를 배울 때 일이다. 우리 반에 새로 들어온 학생이 있었는데, 그에게 우리 그룹 학생들을 소개해주면서 미국학생인 'Anne Murphy'를 '안 머피'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은 '안 머피'가 아니라 '앤 머피'라고 이름을 교정하면서 불쾌해 했다.

 

올바른 용어 사용 중요

 

필자의 소개 실수에 대해 너무 불쾌해하는 앤을 보면서 처음에는 의아해했는데, 그 경우를 필자 자신에게 역으로 적용해보니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기말고사를 치르다보면 답안지의 담당교수란에 필자 이름을 '우제명'이라고 기입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고의성이 없음을 알기에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 기입된 이름을 보며 섭섭한 마음을 숨길 수 없을 때도 있다. 이처럼 그 존재의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 존재의 존엄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약간은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른 이름 사용이 중요하듯, 생명윤리 분야에서도 올바른 용어 사용은 중요하다. 잘못된 용어 사용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악용의 여지가 크다.

 

 필자는 현행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이하 생명윤리법)에서 배아에 대한 용어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명윤리법에서는 배아를 "수정란 및 수정된 때부터 발생학적으로 모든 기관이 형성되는 시기까지의 분열된 세포군"(제2조 제7항)으로 정의하고 있다. 최근 입법예고를 거처 법률 심사 과정 중에 있는 생명윤리법 전면 개정안에서도 여전히 '세포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배아는 발생학적으로 정자의 반배수체(n)와 난자의 반배수체(n)가 융합돼 형성된 수정 개체(2n)로서, 성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유전자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분류되는데, 이는 어떤 특수한 기능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종이 소유하고 있는 유전자에 따른 분류이다.

 

 배아는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유전자를 이미 모두 내포하고 있으며, 모체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를 단순히 '세포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명윤리법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배아를 왜 단순히 세포군으로 명명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배아를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배아가 수단화되는 모순

 

 생명윤리법에서는 잔여배아를 발생학적으로 원시선이 나타나기 전까지 연구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제17조 참조) 체세포복제배아를 연구목적으로 생성하여 연구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제22조, 23조 참조).

 

 이는 생명윤리법이 "생명윤리 및 안전을 확보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거나 위해를 주는 것을 방지"(제1조)하기 위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생명인 배아가 연구용으로 수단화되는 것을 허용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생명공학 시장 확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자리 잡고 있다. 결국 배아는 사회의 경제적 부를 위해 수단화되고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 가치가 희생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경제효용성이 우선시되면서 끊임없이 경제적 부를 창출하기 위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지상주의 상황에서는 경제적 이득이 보장된다면 윤리적 희생은 감수하겠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이다」의 저자 더글러스 러머스는 성장, 효율성 등을 우선 가치로 여기는 경제지상주의의 현대인들을 타이타닉호 승무원에 비긴다.

 

 타이타닉호 승무원들은 빙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실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 안에서는 그저 먹고 즐기고 있다. 설사 배가 좌초될 위험에 처한 상황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축제로 들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배의 좌초위기에 대한 경고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실을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 비유한다는 것은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가치가 단순히 경제효용성에 양보되고 희생된다면 이러한 상황이 현실화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사회에서 생명가치가 우선 존중되고, 배아에 대한 올바른 용어가 부여되지 않는 한 생명가치는 계속 수단화되고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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