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역사속의 생명윤리

관리자 | 2008.12.15 23:10 | 조회 2763

역사 속의 생명윤리
송상용 (한림대)

1. 생명윤리의 탄생

생명윤리는 20세기 마지막 10년에 갑자기 폭발적인 인기학문으로 떠올랐다. 생명윤리의 중요성은 윤리학, 아니 철학을 압도할 정도이다. 그것은 생물학의 한 분야로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생태학이 환경문제가 대두하면서 생물학 전체와 맞먹을 만큼 중요해진 것과 비슷하다. 1988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출발한 일본생명윤리학회는 천명이 넘는 회원을 갖고 있으며 거의 모든 일본 철학자들이 생명윤리를 한다고 나서는 형편이다.

미국생명윤리학회는 1992년에 창립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막강하며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정부, 기업 등 여러 기관의 자문에 응하고 특강에 끌려 다니느라 몸을 쪼개도 모자랄 판이다. 조지타운, 위스칸신, 미니소터, 스탠퍼드, 피츠버그 , 사던 캘리포니어 등 주요 대학에 생명윤리연구소가 설립되어 맹활약을 하고 있으며 펜실베이니어대학의 생명윤리센터는 전임 연구원만 20명을 넘어선다.

국제생명윤리학회(IAB)는 1992년에 암스터르담에서 창립되어 부에노스 아이레스, 샌 프런시스코, 도쿄, 런던을 돌며 다섯 차례 세계생명윤리회의를 열었다. 1995년 베이징에서 동아시아생명윤리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동아시아생명윤리학회(EAAB)가 결성되었다. 1997년 일본 고베에서 있은 제2회 동아시아 생명윤리회의에서는 학회를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로 확대하기로 하고 이름을 아시아생명윤리학회(AAB)로 바꾸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1996년 의사들이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만들었고 1997년 철학자, 생물학자, 의사, 사회과학자, 법학자들이 모여 한국생명윤리학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학계의 참여가 미미해 선진국들에 견줄 처지가 아니다.

생명윤리(bioethics)란 말은 1970년 미국의 종양학자 포터가 처음 썼다. 포터는 생명윤리를 "생물학 지식과 인간의 가치체계에 관한 지식을 결합하는 새 학문분야"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생명윤리는 진화론적·생리학적·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권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학문'이었다. 1971년 라익은 생명윤리를 "의학 및 생명과학의 윤리적 차원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면서「생명윤리백과사전」의 편찬에 착수했다.

이제 생명윤리는 고전적 의료윤리와 환경윤리, 그리고 현대의 생명과학기술이 제기한 윤리를 포괄하는 넓은 뜻의 용어가 되었다. 생명윤리학은 일종의 응용윤리학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다같이 인정하고 있는 윤리적 원칙을 생명의 영역에서 생기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가의 기술적 문제를 검토하는 분야이다. 그것은 의학과 첨단 생물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여러가지 문제들의 윤리적 정당성과 그 한계를 다룬다. 의료윤리는 히포크라테스 이전부터 끊임없이 문제되어 왔지만 현대에 이르러 생명과학기술이 일찍이 없었던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자 생명윤리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일본 생명윤리학계의 선구자 사카모토는 생명윤리를 일종의 기술평가로서 근대과학에 대해 미래로 향한 비판과 재평가 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1979년 연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한국에서 의료윤리교육의 불을 지핀 미국의 윤리학자 포슌은 생명윤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때로 1960년대를 꼽는다. 1960년대는 흑인해방운동, 여성해방운동, 생태학운동, 반군사운동 등이 선진국들을 휩쓸면서 도덕의식이 크게 높아진 때였다. 정부의 의료사업 참여가 늘어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과학자들에게 의료문제를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윤리적 문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의학 자체의 기술적 성공으로 첨단 의료기기들이 나오자 심각한 윤리문제가 대두했다. 케네디윤리연구소의 월터즈는 학문분야와 사회운동으로서 생명윤리가 태어나는 데 이바지한 다섯가지 요인을 든다. 첫째,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의료기술의 꾸준한 증가이다. 둘째, 인권운동의 출현이다. 셋째, 생물학과 의학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인권의 침해이다. 넷째, 시민들에게 싸게 공중보건계획을 제공하려는 노력이다. 다섯째, 생물과학과 임상의학에서 윤리행위의 지구적 표준을 탐구하는 것이다.

1969년 지금은 헤이스팅스 센터(Hastings Center)로 된 윤리·사회·생명과학연구소(Institute of Ethics, Society and the Life Sciences)가 국립인문학지원기금(National Endowment of Humanities)과 라키펠러재단의 지원을 얻어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에는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아 케네디윤리연구소(The Kennedy Institute of Ethics)가 조지타운대학 안에서 문을 열었다. 생명윤리 연구는 이후 급속히 확산되어 많은 연구소들이 태어났고 이런 경향은 1990년대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2. 히포크라테스 선서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460-―370)는 병의 원인을 신 아닌 자연에서 구함으로써 과감하게 과거의 의학과 인연을 끊었다. 그는 미신, 쓸데없는 철학과 수사학을 거부하고 관찰경험과 논리적 추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의학을 세웠다.
70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진「히포크라테스 전집」(Corpus Hippocraticum) 곳곳에는 의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윤리에 관한 최초의 진술은 임상 책「전염병」(Epidemics)에 나온다. 임상보고서 한가운데 의사의 윤리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다. 병에 관해서는 “도와 주되 해치지 않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라고 한다. 이 간결한 말은 의사가 환자에 대해 갖추어야 할 원칙이다. 왜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해야 할까? 동료들의 불완전한 작업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이 말은 훌륭한 의사가 의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시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치료노력이 위험하고 대중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사들이 생생하게 알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그 기원이 분명치 않다. 한때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들”패거리로 들어가는 시작의식으로 히포크라테스 자신이 말들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으나 학계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서에 처음 언급한 사람은 1세기에 의사 스크리보니우스(Scribonius Largus)였다.
선서의 첫머리에는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고 일생 받들며 돕겠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스승의 자제를 형제같이 생각하고 원하면 정성껏 무료로 의술을 가르치겠다고 한다. 이것은 도제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의사조합의 강한 유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다음 설사 요청을 받는다 하더라도 극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낙태도 시키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칼을 쓰지 않겠다는 말도 보인다. 이것은 선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믿어지는 피타고라스학파가 낙태에 반대했고 피흘리는 것을 금했다는 점과 관련해서 흥미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칼을 쓰지 않겠다고 선서를 한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집도하게 했으므로 그리스사람들이 해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며, 또 반드시 내과의와 외과의를 구분했다고 해석할 필요도 없다.

선서는 치료와 관련된 신들 아폴론, 아스클레피오스, 히기에이아, 파나케아에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서의 전반부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계약이며 후반부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관한 서약이다. 그런데 금기가 당시의 실제 관행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어서 선서는 보편적 의사의 윤리가 아니라 특정집단의 구성원에게 유효한 계약이라는 해석이 있다. 환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것도 환자에 남자도 있으므로 동성애를 암시한다. 또한 환자는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까지 포함함으로써 상당히 전보적인 입장임을 보여 준다.

반세기전 의학사가 에델슈타인은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그리스 의사들의 널리 퍼진 관행이 아니라 피타고라스를 따르는 소수 의사들의 사적 서약이라는 해석을 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곧 선서의 구절 구절이 피 흘리는 것, 태아 죽이는 것, 살인을 금한 피타고라스 신앙의 교의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자살이나 안락사는 비도덕적이 아니었고 피임, 낙태도 널리 퍼져 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낙태를 권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선서의 여섯가지 금기는 코스(Kos), 크니도스(Knidos)학파와는 다른 별개의 의학전통, 곧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소수의사집단의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호소력 있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에델슈타인의 해석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본다. 고대의학의 문화적 세계는 복잡한데 그는 피타고라스주의 어두운 잔재에 너무 의존했고 대중의 도덕에 바탕을 둔 해석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히포크라테스선서는 뒤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 교리에 부합되어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윤리가 득세하면서 전체 의사들의 관행으로 정착했다.


3. 유대-그리스도교 신학의 자연관

중세기술사학자 화이트 2세에 따르면 중세 서구에서의 자연관의 변화는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말미암은 것이다. 본디 그리스 사람들은 물활론적인 자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자연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들어와 공인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자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의 물활론적인 요소를 철저히 뿌리뽑았다. 교회는 정령 숭배를 성자 숭배로 돌려놓았다. 자연은 영혼 없는 죽은 세계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을 독점하게 된 인간은 그 점에서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로 올라섰고 영혼이 없는 자연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세기 첫머리에 보면 신은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을 만든 다음, 맨 끝으로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 신은 인간이 지배하는 데 편리하도록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창조된 어떤 존재도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운명지어졌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자연을 멋대로 이용하고 개발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을 신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다.

사람의 몸은 진흙으로 빚어졌으나 그는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신의 형상을 따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알고 보면 그리스도교는 신을 받드는 것만 빼놓고 가장 인간중심적인 종교이다. 이제 인간과 자연은 둘로 나누어지고 인간은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적인 자연 개념은 중세 서방 라틴세계에서 기술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이와 같은 자연관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생태학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화이트 2세는 이렇게 주장한다.
화이트 명제는 환경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철학-종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없는 지역에서는 환경보전이 잘 되었느냐는 반론이 당장 나왔다. 유대-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기껏해야 간접 영향을 주었을 뿐이고 환경오염의 주범은 자본주의, 민주화, 도시화, 인구 증가, 부의 증가, 자원의 사유 등 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문제의 초점인 구약의 해석도 간단하지 않다. 구약이 인간의 지배를 주장하지만 신이 동물의 운명을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넘긴 것은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푸른 풀은 짐승의 먹이이므로 인간만이 쓰라고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홍수 뒤에 신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지상에서 풍부하게 증식하라고 지시하는 근거를 대면서 창세기가 인간중심주의임을 부정한다.

구약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연이 성스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이 성스럽다는 견해의 거부가 그것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런 태도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벌목하는 사람이나 백정이 도끼나 칼을 들 때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나무나 동물의 용서를 비는 사회가 있었다. 독일의 삼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19세기까지 이런 태도가 남아 있었다. 유대-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이런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신만이 신성하며 자연은 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 파스모어는 이 문제에 관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인간과 생물 사이에 연결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지 않는다. 구약은 절대로 신 중심이어서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안간과 동물을 분리하고 자연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데서 순수한 구약보다 자연에 대한 더 오만한 태도의 씨를 볼 수 있다.

구약은 모든 점에서 하나의 관점을 가진 책으로 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새로운 인간 중심의 농업과 유대인들이 향수를 품은 낡은 자연 중심의 유목 전원 생활 사이의 갈등이 있다. 전자는 자연을 변형하며 후자는 인간이 생물과 지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신과 함께 인간 중심적이다. 칼뱅은 신이 인류를 위해 만물을 창조했다고 확신했다. 신은 우주를 하루에도 말들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엿새를 소비했다. 인간은 마지막에 들어옴으로써 중요함이 나타나는 귀빈처럼 지구에 입장했다는 것이다.

화이트 2세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할 권리가 있다는 그리스도교적 근본 전제를 수정하지 않고서는 환경위기가 극복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을 형제로 여긴 중세의 이단적 수사 성 프란치스코를 새 수호성인으로 받들 것을 제안한다. 문제의 근원이 종교적인 만큼 치료도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4. 우생학ㆍ인체실험ㆍ세균전

우생학(eugenics)은 1883년 골튼(Francis Galton)이 만든 말이다. 그것은 ‘좋은 출생’이라는 뜻으로 유전적 수단을 써서 인류를 개량하려는 과학이다. 골튼은 1907년 영국우생학협회를 만들었다. 첫 우생학 교수 피어슨(Karl Pearson)은 가난한 사람들의 높은 출생률이 문명에 대한 위협이며 높은 인종이 낮은 인종을 대치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우생학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 1926년 미국우생학협회를 만든 사람들은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고 북유럽백인이 다른 백인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1924년 제정된 미국의 이민법은 동유럽, 남유럽의 이민을 크게 줄이는 내용이었다. 1931년에는 미국의 27개주가 유전학적 거세법을 만들었다. 거세법은 1930년대에 유럽 여러나라에서 통과되었다. 정신이상자, 백치, 정신박약자, 범죄자들처럼 사회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휩쓴 것이다.

때마침 나치가 집권한 독일에서는 우생학이 철저히 악용되어 큰 비극으로 발전했다. 1921년에 나온 바우어(Baur), 피셔(Fischer), 렌츠(Lenz)의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적인「인류유전학」을 옥중에서 읽은 히틀러는 인종주의를 강한 정치무기로 썼다. 1934년 나치는 모든 정신박약자, 알콜중독자, 정신병자를 강제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시행했다. 처음 3년 동안 20만명이 거세되었다. 1939년까지는 40만명이 거세되었는데 그 1퍼센트에 해당하는 3500명이 수술중 죽었다. 거세 결정은 인류유전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했다.

정신의학 교수 뤼딘(Rüdin)의 주장에 따라 반사회적인 사람들의 거세가 추진되었는데 그 수는 백만으로 추정되었다. 이 안은 내무부가 찬성하고 법무부가 반대해 입법은 되지 않았지만 그 일부인 집시들의 희생이 컸다. 독일 오스트리아에 있던 집시 3만명 가운데 2만이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보내졌고 순수 집시 6가족만 공식적으로 구제되었다.

인체실험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공헌한 면이 있지만 그 역사는 인간 남용의 두드러진 보기이다. 나치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유대인, 집시 등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수용소 의사로서 10만을 죽인 멩겔레(Mengele)의 쌍둥이 실험은 악명높으며 산소공급을 줄여가는 고도 연구, 물 속에 사람을 넣어 얼리는 연구는 잔혹의 극치였다. 대학살에서 의사들은 최종결정의 집행자로서 중요한 몫을 했고 과학이 대학살을 정당화했다.

전후 194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재판에서 20명의 의사와 세 의료행정가가 “의학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살인, 고문, 잔학행위”로 기소되었다. 그 가운데 9명은 장기형, 7명은 교수형을 받았다. 이 재판의 결과로 뉘른베르크 강령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리적·법적 개념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켜야 할 10개 기본원리가 담겨 있다.

1933-45년 일본은 중국 똥베이(東北) 핑팡(平房)에 ‘죽음의 공장’을 세워 놓고 생체실험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관동군 731부대에는 500명의 과학자, 의사를 포함한 3000명의 직원이 있었고 중국, 러시아, 몽골, 한국사람 3000명이 고문, 살해되었다. 731부대 네 지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죽음의 공장에서는 죄수, 길에서 잡은 마약중독자,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했다. 이것은 일본 군의들의 훈련이 주목적이었지만 그들의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인들은 죄수들에게 총을 쏘고 탄환을 뺀 다음 팔다리를 잘라 상처 부위를 꾀매고 죽였다. 죄수들은 표준과는 거리가 먼 치료를 받으며 죽어갔다.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백신을 주사하기도 하고 전장에서 피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 말의 피를 수혈하기도 했다. 밀폐된 방에서 독가스를 마시거나 기압을 내리거나 여러 가지 조건에서 사람이 얼마나 견디는가를 실험했다.

더욱이 일본은 731부대에서 인체를 써서 조직적인 세균전 연구를 했다. 일본은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등 각종 세균을 대량 생산했다. 죄수들은 벼룩에 물리고 세균에 오염된 음식을 먹거나 혹한에 야외에서 세균폭탄에 노출되어 죽어갔다. 세균전 실험은 일반시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하얼빈의 우물들에 장티푸스균이 투입되었고 난징에서는 세균이 들은 음식을 먹은 죄수들을 집에 보내기도 했다. 전후 똥베이 지방에서 전염병이 창궐해 수만명이 죽은 것은 그 후유증이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 미국 조사관들이 731부대의 생물전 전문가들을 심문했고 인체실험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은 처음에는 주요 정보를 주지 않고 전범에서 면제해 줄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흥정 끝에 미국은 면죄를 보장했고 부대장 이시이(石井)는 상세한 생물전 보고서를 쓰기로 약속했다. 600쪽에 이르는 자료는 미국에 제공되어 미국의 생물전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주어진 사면은 미국정부 고위층의 동의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731부대 소속 의사들은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귀국해 의과대학장, 대학총장, 고위 보건관료로 출세의 길을 달렸다. 중국 의사 천(陳元方)은 미국이 나치 의사들을 전범으로 단죄하면서 일본 의사들을 이용함으로써 이중 윤리적 잣대를 적용한 데 대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일본 철학자 츠치야(土谷)는 대학살이 가능했던 배경을 분석한다. 첫째, 일본의 군사통치는 잔인했고 인체실험은 일본군의 대규모 학살의 일부였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가 지상목표였고 천황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 둘째,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을 경멸했다. 더구나 우생학,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외국인들을 인간적으로 다룰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셋째, 간첩, 저항 혐의 있는 사람들은 재판 없이 처형하는 게 관례였다. 그들은 처형만 하기보다 유용한 자료를 얻어 연구에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넷째, 인체실험이 밀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사들은 인간의 공통감각을 잃었고 윤리적인 제재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의사들은 왜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까? 츠치야의 답은 이렇다. 첫째, 전시에 군에 협조하는 것은 당연했다. 참여를 거부하면 비국민으로 낙인찍히므로 저항은 불가능했다. 둘째, 의사들은 의과대학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주임교수에게 중국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어기면 학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731부대는 최고의 연구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요컨대 일본 의사들이 거역할 수 없었던 절대권위는 일본 윤리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가능했고 이 가치 때문에 대학살이 일어났으며 전후 공식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북한과 중국은 미국이 북한과 중국 똥베이에서 세균전을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슬로 세계평화회의에서 국제과학위원회 구성이 결정되었고 중국과 북한에 파견된 국제과학위원회는 세균전을 확인하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국제적십자위원회와 세계보건기구에 의한 공정한 조사를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문제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한국에서의 세균전이 사살인지 공산주의 선전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의 세균전 결과를 이용했고 세균전 금지 국제협약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연구개발을 해 온 것은 불리한 점이다. 미국이 탄저균 테러를 당하는 것을 보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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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윤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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