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생명에 대해서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관리자 | 2008.12.15 23:14 | 조회 1511

생명에 대해서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Fr. Frank A. Pavone
가톨릭교회는 일관성 있는 생명 윤리를 고백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쓰십니다.

생명이 관련된 곳에서는 사랑의 봉사가 반드시 심오한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생명은 모든 단계, 모든 상황 속에서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편견과 차별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생명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생명의 복음 87항)

무엇이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 입니까?
일관성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성 자체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백성을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만이, 인간 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모든 인간 생명을 포함 합니다. 하느님과 한편에 선다는 것은 생명과 한편에 서는 것이고, 그러므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편에 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어떠한 공격이 가해지든지 간에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합니다.

가톨릭 신자들과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공통된 인간성으로 인해, 낙태와 안락사, 교육과 건강관리ㅡ 사형제도, 범죄, 전쟁과 분노, 그리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영향을 주는 많은 문제들에 관해서 관심을 갖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문제들을 보기 전에 먼저 인간을 보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형제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줄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생명과 정의 지원을 위해 활동하게 될 때, 그들은 단순히 그런 주장에만 응답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이며, 그분께 응답하는 다양한 방식들은 그들이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일에 투신하거나 또는 낙태를 중지시키는 일에 투신하거나 어떤 일을 하든지 서로 간에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문제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미국 주교들은 개별적이거나 하나의 주교단으로서 모두, “시종일관된 생명의 윤리”라는 구절로 일관성 있어야하는 우리의 의무를 표시했습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 제안자는 시카고의 죠셉 베르나르딘 추기경이었습니다. 죠셉 베르나르딘 추기경은 그분이 미국 주교단의 사목서한인 ‘평화의 도전’에서 하셨던 일의 빛 안에서, 그리고 전국 가톨릭 주교회의의 생명운동 위원회 의장인 위치의 맥락 안에서 이 주제에 대한 공적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현대 기술발전으로 가능해진 파괴의 힘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류의 내부 연결을 보았습니다.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넓은 범위의 위협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베르나르딘 추기경은 인간 생명을 수호하기 위한 많고 다양한 노력들의 내부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활동 장소 안에서의 생명의 수호와 보호의 발전은 모든 활동 장소 안에서 생명의 수호를 위한 발전인 것입니다.
이 점은 많은 각도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이가 살인을 사회문제의 한 해결로 본다면, 그런 견해는 낙태와 마찬가지로 사형제도도 권장하는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의 가치를 그 또는 그녀의 생산성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말기 환자들과 또는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위한 좋은 교육으로 문을 개방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서도 기회를 만들어주는 동일한 사회를 가능케 하는 태도를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몇 가지의 오해들

“모든 문제들은 동등하다.“
어떤 이는 일관성이란 동일한 중요성 또는 긴급성을 의미한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르침의 공통된 오해입니다. 시종일관된 윤리의 핵심은 엄밀히 문제들의 연관성이지만, 그것들은 명확하게 서로 다른 문제들입니다.

1984년의 연설에서, 베르나르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치적인 책임에 대한 주교들의 성명서를 논의할 때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교회와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시대 문제들의 범위를 발표하는 이 사실에서 도덕적 관점으로 볼 때 모든 문제들이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각 생명의 문제들은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구별되어 있으며 각기 고유의 독특한 도덕적 분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985년의 또 다른 연설에서, 추기경은 이 문제들 가운데에는 하나의 계급체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인권은 생명권으로서 - 수태의 순간으로부터 임종까지의 생명권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권리, 건강관리의 권리를 포함한 모든 권리의 원천이다.”

1989년 10월 1일, 생명 존중 주일에 관련하여, 베르나르딘 추기경은 “생명을 위하여 결정하기”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모든 가치들이 똑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좀 더 근본적입니다. 생명 존중 주일에, 나는 이 지상의 어느 가치도 인간 생명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간 생명은 자유와 다른 기타의 권리들을 즐기기 위한 조건입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 그들의 실존을 위하여 생명에 딸린 덜 중요한 인간 가치를 보호, 또는 봉사하는 것과 인간 생명 자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인간 생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생명이 근본적인 가치라는 인식이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선택적인 낙태의 경우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낙태로 인해, 매일 4,000명이상과 매년 천오백만 명의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주교단에 의해서 생명운동 활동(2001년 재판 본, 생명 지지 캠페인), 을 위한 사목 계획안에서 반복되었는데, 그 사목계획은 시종일관된 윤리에 관한 부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교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 중에, 낙태는 중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무죄한 인간생명의 직접 살인인 낙태는 항상 중대하게 부도덕한 것이다. (생명의 복음 57항); 그 희생자들은 가장 취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들 중에 가장 작은이들에게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정의의 이 문제에 긴급한 주의와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초점과 시종일관된 생명의 윤리에 대한 교회의 투신은 서로 보충적입니다. 도덕적 원칙의 수준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는 시종일관된 생명의 윤리는 낙태와 안락사 또는 인간생명에 관해 건드리는 모든 같은 수준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시종일관된 도덕적인 전망 안에서 각기 적합한 자리를 주면서 각 문제의 독특한 성격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 문제들이 산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만 봅니다: 그들은 정렬해놓고 계산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내게 말하기를, “낙태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 오직 하나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근본은 오직 집들의 여러 부분의 하나 일 뿐입니다.” 1998년 ‘생명의 복음을 살기’라는 문서에서, 미국 주교들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권리들과 인간 존엄성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집의 근본은 생명권 그 자체입니다. 주교들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반대가 가난과 폭력 그리고 불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생명의 어떤 정략도 심각하게 인종주의ㅡ 빈곤, 기아, 고용문제, 교육, 주거, 건강관리 등의 문제들을 역점을 두어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신자들은 이런 모든 영역 안의 약자들과 뒤처진 사람들을 위한 옹호자들로서 기꺼이 투신해야 합니다.
가톨릭공직자들은 생명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을 존중하도록 장려해주는 시종일관된 정책을 조성하고자 모색하면서 이런 각각의 문제들을 역점을 두어 다룰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서 “정당하다” 라는 사실이 무죄한 인간생명에 직접 공격을 고려하는 잘못된 선택을 결코 용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가장 취약한 단계에서 생명수호와 보호를 실패한다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른 문제들 안에서의 어떤 “정당성”의 주장도 의심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을 “성령의 성전” - 하느님의 살아있는 집 -으로서 이해한다면 논리적으로 이 문제들은 그 집의 대들보와 벽들입니다. 낙태와 안락사처럼 무죄한 인간생명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공격은 집의 근본을 공격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권리를 침해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경시하는 것은 우리의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공격은 궁극적으로 기타의 다른 인권 파괴의 방식으로 사회적 양심을 마비시키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살기 23항)

“모든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1986년 시애틀 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베르나르딘 추기경은 시종일관된 윤리의 또 다른 공통된 남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시간, 에너지, 그리고 적임성 등의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개별적인 성소에는 하나의 형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문화해야 하고, 단체들은 그들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합니다. 시종일관된 윤리는 이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때때로 개별적인 활동 안에서 보여주는 것 보다 더 폭 넓은 생명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1984년 웨이드가 연설에서 말하기를,

시종일관된 윤리는 교회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만, 한 개인과 단체로서 한 가지 문제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낙태를 반대하든지 또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든지 간에, 우리가 한 개의 위협을 반대하는 방식이 생명의 체계적인 전망을 위해 지지하도록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 각의 문제에 매달려 있을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전체로서 몇 가지 문제들 가운데에서 의식적이고도 명백한 연결 관계를 배양시키는 것은 모두 가능하고도 필요합니다.

실천으로 옯기기
시종일관된 윤리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어야만 합니다. 이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주어진 운동의 활동가는 다른 운동의 활동가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그런 활동가들이 출판하는 자료들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과 상호 작용을 통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 문제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주제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때때로 다른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합니다. 낙태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 옹호자들이 생명을 처분할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을 해야 하고, 사형제도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낙태 역시 그렇다고 말 할 때에만, 두 쪽 연사들 모두의 사명은 강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서로 내적 연결된 다양한 운동들의 저명한 대변인들이 같은 연단에서 좀 더 많은 합동 연설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또한 교회의 광범한 관심 분야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활동들을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낙태 병원에서 기도하는 시위를 갖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가장 가까운 무료급식 시설을 향해 행진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것은 어떨까요?

투표소
시종일관된 윤리를 적용하기 어려운 분야는 정치 영역입니다. 여기 처음의 고찰은, 물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종교 소집단이 아니라 땅을 쇄신시키도록 부름을 받은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요한 바오로2세는 2003년 4월의 회칙서한, Ecclesia de Ecucharistia에서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주십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전망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기대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묵시21,1),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세상을 위한 우리의 책임감을 축소시키는 대신 증가시킵니다. 나는 새천년의 시작에서 이 점을 재차 강하게 재 단언하고자 하니,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안에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경시하지 말도록 그 어느 때보다 더 더욱 의무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다 인간다운 세상, 하느님의 계획과 함께 조화가 충만한 세상을 건설하는 복음의 빛으로 기여할 과제가 있습니다. (20항)

이 과제는 우리를 투표소로 데려다 주며, 투표의 책임과 함께 후보자는 어디에 있으며, 그들 각자의 정당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느 사안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의 적은 소식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후보자가 진정으로 문제시되는 문제의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타당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데 심각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당에게 단순한 충성심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당이나 어느 후보자도 복음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해내지는 못합니다. 우리 주교들은 “우리의 동료 시민들이 정당 정치 너머를 보도록, 수사학적인 공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지도자를 정당 가입이나 단순한 개인-관심으로가 아니라, 원칙에 따라서 선택하도록” 촉구하십시오 (생명의 복음을 살기. 34항).
문제들의 연계와 체계순위에 관하여 위에서 강조된 원칙들이 후보자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구체화시켜야 합니다. 핵심 문제들에 관한 그들의 입장은 우리에게 후보자들의 성격, 그리고 비슷한 다른 문제들이 대한 있음직한 그들의 응답을 미리 감지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요한바오로2세는 1988년의 사도적 권고, 교회와 세상 안의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사명에서 지적하시기를,
만일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권리이며 모든 다른 인격권의 조건인 생명권이 최대한의 결단으로 수호되지 않는다면 인권들 - 예를 들면, 건강권, 주거권, 노동권, 가정권, 문명권 - 에 관해서 이루어지는 공통적인 부르짖음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38항)

다른 말로 하면, 만일 당신이 생명 그 자체의 한 몫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떤 이에게 생명의 좋은 일들의 한 몫을 보장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후보자를 구하기는 거의 어렵습니다. 그러나, 핵심 질문은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문제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입니다.

어떤 불일치는 기초적 권리를 가장 잘 보호하는 데에 관계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후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 불일치하지 않고, 어떻게 가난을 줄일 것인지 다른 접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불일치들은 어떤 그룹들, 태어나지 않은 존재도 사람인가에 대한 불일치처럼 어떤 그룹은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지에 관계하기도 합니다. 나중 것과 같은 유형의 불일치는 보다 결정적입니다. 만일 한 후보가 인간 존재로부터 기본권을 빼앗는 정책을 지지한다면, 그는 또한 정부의 어떤 특정한 견해, 즉 인간에 봉사하기 보다는 지배하는 견해를 지지하게 됩니다. 그런 정부 아래에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권리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결론
베르나르딘 추기경께서는 다음 말씀과 함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을 보다 폭넓은 과제로 부르십니다.

분명히 우리는 낙태로 인간 생명을 빼앗는 것이 기아에 대항하여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데 실패하는 것과는 같지 않음에 모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분을 함에 있어서, 두 가지 다 가톨릭 공동체와 우리 사회 전체가 전체로서 응답을 요구하고 있는 도덕적 문제라는 요점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시종일관된 윤리의 논리는 두 가지 문제의 도덕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시종일관된 논리의 귀결은 다른 장소가 아닌 한 장소 안에서 도덕적 의미를 보는 교회 안 모든 단체들의 위치를 고찰해보자는 것입니다. 윤리는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길을 분담합니다: 생명수호 단체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며, 정의와 평화 단체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시종일관된 윤리의 의미는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인 전통은 보다 광범한 사회 안에서 출생 전과 후, 그렇게도 분명한 분리를 너머서서 우리를 생명의 도덕적 증인으로 내세우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애틀 대학교, 1986년)

사회정의와 생명권 사이의 간격에 정당성은 없습니다. 정의의 핵심은 생명 수호이며 모든 권리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일관성이란 선택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견해가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투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불일치의 이상한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가 복음에 투신한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한 승리의 그 날이 앞 당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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