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아하! 생명윤리] 34- 자살

관리자 | 2008.12.15 23:16 | 조회 1114

[아하! 생명윤리] 34- 자살
906호 발행일 : 2007-01-28

이동익 신부(가톨릭대 의과대학 교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악령」에서 자살은 하느님께 대한 거부의 표현이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최고의 주인이란 점을 주장하려고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명까지도 처분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생명 거부를 통해 생명을 자신에게 선사한 하느님까지도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가 자살에 대해 대죄라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고의적으로 반역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자살은 하느님을 거역한다는 철저한 계산에 의해 생겨나는 행위만은 아닐 것이다. 자살은 일종의 절망적 행위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실패했거나 혹은 경솔한 결정이나 정신적 혼란을 통해 순간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려 스스로의 삶을 캄캄한 어둠 속으로 던져 버리는 행위이다.

 2004년도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30명이 자살하고, 35만명이 자살을 시도한다고 한다. 그 원인은 경제, 사회문제를 비롯해서 최근에는 불치병 등의 이유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살 관련 사이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심지어는 자살 거래까지도 공공연히 이뤄진다고 하니 실로 충격적이다. 그야말로 인간성 상실의 시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지를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이 삶을 비관해 자살하고, 빚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혹은 불치병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이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안락사 예방을 위해 환자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줄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처럼, 절망하는 사람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친근한 관심이 필요하다. 또 충동적 자살 성향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자기파괴적 충동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종종 그들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끄집어내 줌으로써, 또한 그들의 긍정적 특성들을 부각시켜 줌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웃과 도움을 주고받음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것은 삶의 당연한 법칙이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잘 가꿀 수 있도록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이 곧 살아가는 한 방식인 것이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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