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홍영선 교수의 생명칼럼] 6.사전(事前) 유언

관리자 | 2008.12.15 23:20 | 조회 1451

[홍영선 교수의 생명칼럼] 6.사전(事前) 유언


전문지식?양심에 따라 치료 결정을

“나를 중환자실로 보내지는 말아줘.” 몇 해 전 설날, 고향에 갔을 때 연로하신 친척 아주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당시 다른 친척 한 분이 회생가능성 없는 말기질환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계시는데 여러 가지 연명치료를 해도 오래 견디지는 못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 가족들이 중환자실 밖에서 망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만약에 내가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면 중환자실로 보내서 의미 없는 치료를 계속하지 말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하시는 것 이었다.

최근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의학적 치료의 개념은 ‘건강한 상태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 외에도, 말기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포함’ 하는 것으로 변화됐다. 또한 의료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환자의 자율적인 선택권 역시 전에 비해 더 많이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명연장 기술이 반드시 삶을 연장한다고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을 가능성도 없고 곧 돌아가실 것이 예상되는 말기 환자의 자연적인 임종을 방해하고 죽음의 과정만을 연장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됐다. 반대로 환자가 일찍 세상을 떠날 목적으로 생명연장 치료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안락사가 될 수 있어, 모든 경우에 환자의 자율권을 존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전 유언(advance directives)은 누구든지 건강할 때에, 미래에 자신이 말기 환자가 되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작성해 놓는 것으로, 환자의 자율적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법적 대리인이 이를 작성할 수도 있다. 또 회생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를 공식화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 43개 주에서 사전 유언을 공식화하고 있고 24개 주가 대리인 지정을 입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의 호주, 뉴질랜드, 홍콩 등 영국의 제도를 따르는 나라에서는 이미 이 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싱가폴, 타이완에서도 각각 1996년, 2000년에 이 법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그러면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항상 옳을까?

불치병 말기 환자에게 시행하는 간호행위나 치료 수단 등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하는 통상적인 치료 수단(ordinary means)과, 그 사용이 정당하기는 하나 의무는 아닌 것으로 분류되는 예외적인 수단(extraordinary means) 등으로 나누는데, 가톨릭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통상적인 치료수단은 중단할 수 없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예외적인 수단은 말기 환자에게 시행되었을 때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죽음의 과정을 연장할 뿐인 치료나 처치는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말기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해 호흡을 유지하는 경우, 심장박동을 유지할 목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결과 죽음의 과정을 연장할 뿐인 경우가 이에 해당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예외적인 수단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수혈, 혈액투석, 튜브를 통한 영양공급 등은 정상적으로 이에 포함되지 않으나, 완치 가능한 사람의 경우에 통상적인 치료 수단에 해당될 항목이 말기 환자의 경우에는 예외적인 수단에 포함될 수 있어 이에 대한 결정에는 상황 상황마다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다. 중요한 것은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의사의 전문적인 지식과 올바른 양심이 될 것이다.

사전 유언에 관한 여러 가지 우려와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사전 유언이 제도화되면 의사들의 전문적 판단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거나 오히려 의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살 권리가 죽을 권리와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의 결정에 건강문제보다는 의료비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소극적 안락사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싱가폴과 같이 이미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이 문제들에 대한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홍영선 교수 (가톨릭대 의대)
가톨릭 신문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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