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배마리진 수녀의 생명칼럼] 10(끝).성교육은 생명교육

관리자 | 2008.12.15 23:29 | 조회 1557

[배마리진 수녀의 생명칼럼] 10(끝).성교육은 생명교육

성교육 통해 생명에 대한 사랑 체험

성교육 시간에 만나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인도 “성(性)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부끄럽고 은밀하고 편하게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의 성적 태도와 사고, 가치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명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 성. 생명이 나에게 그냥 주어졌을까? 생명이 나에게 선물이 되는 까닭이 있다면 성도 나에게 선물이 되는 까닭이 있지 않을까?

자라오면서 우리는 수많은 성교육을 알게 모르게 받아 왔다. 또 우리는 서로 성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갓난아기 때 부모의 사랑스런 보살핌에서 우리는 신뢰를 배웠고 청소년 시기에 동료 친구에게서 얻은 거짓된 정보나 성지식으로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학교 공교육 시간에는 주요 과목에 밀려, 일찍 끝난 학기말 빈 시간을 이용하여 학교 강당에서 비디오 한 편을 보며 성이 지닌 위험성과 신비를 다 알게 된 듯한 과정도 보냈다. 지금도 많은 성교육 현장에서는 일회성 성교육이 주류를 이루며 인공피임법 혹은 성역할이나 성폭력 예방에 초점을 맞춘 성교육으로 그 의무를 대신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다양한 성교육의 내용과 형태들 안에서 영향을 받은 우리의 성적 사고와 태도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는 힘’과 ‘아빠가 될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생식력, 곧 창조에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깨닫고, 알게 되었을까? 어느 날 깨어나니 어른이 된 것은 아닐 텐데, 나의 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대체 성이란 무엇인가?

여기 중년의 한 여인이 있다. 열여덟 살 때 동네의 한 남자를 사랑하여 임신을 했다. 남자의 집에서는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을 한 소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집에서도 창피하다며 먼 친척집에 보냈다. 소녀는 이미 임신 8개월로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지만 남의 손에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낳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유산을 하고 아이의 시신을 친척집 마당에 묻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의 남자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복수라도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은 아이를 파서 상자에 넣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향의 남자 집까지 가지고 간 죽은 아이의 시체를 남자의 어머니 앞에서 열어 보여 기절하는 것을 본 뒤 그 길로 도망쳐 동두천으로 갔다. 이제 더 이상 찾아갈 수 있는 가족과 친척집은 없었다. 소녀는 동두천의 기지촌에 일자리를 얻었다. 동두천의 생활은 힘들었고 그 와중에 교도소를 네 번이나 들락거렸다. 죄목은 폭행, 절도, 사기, 마약 등이다.

이 비극적인 한 여인의 사례를 들으면서 우리는 성이 지닌 다양성을 목격하게 된다. 열여덟 살 소녀의 신체적인 생식력은 엄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었지만 소녀는 과연 자신의 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맺게 되는 성관계가 언제든지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부모나 가족 중 어느 누구라도 소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위로하고 받아들여 주었더라면 소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죽을 죄를 지은 것이라는 관념이 그 곳까지 몰고 간 것은 아닐까.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온전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올바른 시선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녀가 겪은 불행을 방임하였거나 도왔을 수 있다. 줄 수 있었던 올바른 성교육을 제때에 주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성이라는 문제에 들어가 보면 그것을 단면으로만 볼 수 없는 복합적인 주제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제들의 핵심에는 늘 사랑과 생명이 함께하고 있다. 우리의 종교적인 유산, 우리의 현 문화, 그리고 각 사람이 각기 다르게 겪게 되는 체험 안에서도 성이라는 주제는 생명과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인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분리하려고 할 때 성과 관련된 문제는 생겨난다.

그러므로 성교육은 생명교육이어야 한다. 부모는 일차적인 성교육자여야 하며 가정은 가장 좋은 성교육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성교육이란 사랑을 배우는 교육이며 생명을 사랑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배마리진 수녀 (한국 틴스타 대표·착한목자수녀회)
[가톨릭 신문 : 2008-01-06]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