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칼럼

[배마리진 수녀의 생명칼럼] 9.태아로 오신 예수님

관리자 | 2008.12.15 23:28 | 조회 1505

[배마리진 수녀의 생명칼럼] 9.태아로 오신 예수님

생명 ‘받아들임’은 구원의 시작

내가 1996년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가톨릭대학교 박물관 입구에서 본 성가정상은 아주 인상 깊은 사실주의적인 작품이었다.

만삭의 몸에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성모님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전신이 녹초가 된 모습으로 낙타 배에 기대어 눈을 반쯤 뜨고 계셨고 성요셉도 만신이 피곤한 모습으로 그 옆에 쓰러져 계신 청동의 성가정상이었다. 아마도 여행길에 해산을 앞둔 모습인 듯했다.

사람들의 출생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사연에 따른 상황도 많이 다를 것이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상황에서 혹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이에 대한 부담감,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의 새로운 출발에서 임신과 출산은 부모에게 어떤 느낌일까?

마리아와 요셉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야말로 전 존재를 흔들었을 처녀의 임신, 식민지 시민의 형편으로 긴 여행을 떠나 분만했던 점, 그리고 누구보다 그 탄생을 두려워해서 죽이려 했던 힘과 권력이 숨어 있던 상황이었다.

지금의 우리라면 어떠했을까? 그러한 생명을 받아들였을까?

예수의 부모는 생명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생명을 사랑으로 말이다. 바로 그 시점부터 구원의 계획은 드러나고 있다. 모든 것이 순탄하고 별일 없는 상황에서의 받아들임이라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미국 콜로라도의 스티븐 저먼이라는 전기공은 사랑스런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는데 어느날 일터에서 아내한테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는 공포가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강간을 당했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간 저먼씨는 아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낯모르는 흑인이 침범해 와서 금품을 털고 아내를 강간하고 떠난 것이다. 그때까지 정말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던 한 가정이 하나의 사건으로 풍지박산이 난 순간 이다.

그 일을 당하고 부인은 우울증으로 아무 일도 못하였고 집에 홀로 있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불안감으로 부부생활도 못했고 에이즈나 그밖의 질병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몇 개월 뒤 저먼씨는 아내가 임신이 되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저먼씨의 아내는 자신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자신이 돌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남편에게 말한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그 부부를 힘들게 한 결정이었을까? 그러나 저먼씨는 아내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아이를 함께 키워 보자고 말한다. 그들의 사랑스런 딸은 지금 여덟 살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딸로 크고 있다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적의 글을 남겼다.

‘뱃속에 있는 작은 생명체, 제 아버지의 범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생명체, 죄에 전혀 물들지 않은 생명체, 마치 창세 때처럼 깨끗하고 순결한 새로운 생명체, 어머니의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아기는,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디게 해 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기적으로 만든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들이 그 아기를 받아들인 것부터 놀라운 기적이 아닐까?

이 놀라운 기적은 사랑이다. 자기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의 힘으로 생명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곧 구원이라는 것을 성가정상이 보여주는 메시지다.

한 사람의 탄생 안에는 온 우주보다 소중한 한 생명의 구원 계획이 숨겨져 있다. 나의 탄생이, 나의 현존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그분의 도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그분의 거룩한 구원 계획이 우리의 몸 안에 살아 있다.

성탄은 우리가 지금까지 맺어 온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발가벗고 오신 예수님은 가난하고, 나약하고, 깨지기 쉽고, 보호받아야 할 모습을 상징한다. 마리아와 요셉이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 그러한 관계 안에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이 있다는 것을 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육화를 통해 보여 주고 계시다.

배마리진 수녀 (한국 틴스타 대표·착한목자수녀회)
[가톨릭 신문 : 2007-12-23]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