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문헌

<교황청 신앙교리성>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5.5)

박정우 | 2022.09.23 11:17 | 조회 623

안락사에 관한 선언

-198055, 로마-

 

교황청 신앙교리성

 

 

서론

 

 

인간이 지니는 가치와 권리는 오늘날 논란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관하여,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 특히 생명의 권리를 장엄하게 재천명했다. 그런 까닭에 공의회는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사목헌장, 27) 생명을 거역하는 범죄행위를 단죄했다.
보다 최근에, 신앙교리성성은 인공유산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모든 신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제 본 성성은 안락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공표하는 것이 시의에 맞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가르침의 영역에서, 최근의 교황들은 근본 원칙을 설명해 왔고, 그 원칙들이 전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년 의학의 발달로 안락사 문제의 새로운 국면이 대두되어,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국면에 대한 보다 깊은 해명이 요청되고 있다.


인간 생명의 근본 가치까지도 의문에 붙여지고 문화의 변화로 고통과 죽음을 보는 눈이 달라진 현대사회에서, 의술은 또한 특수한 처지에 놓인 생명을 연장시키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증진하여 때로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쇠와 죽음의 의미에 관하여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고통을 단축시켜 인간 존엄성에 부합되는 듯이 보이는 편안한 죽음’(안락사)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획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러 곳의 주교회의가 신앙교리성성에 이 문제에 관한 질문을 제기해 왔다. 안락사의 여러 국면에 관하여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해온 본 성성은 이제 이 선언으로 주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고, 주교들이 보살피고 있는 신자들에게 정확한 가르침을 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러한 극히 심각한 문제에 관하여 민간당국에 제시할 수 있는 반성의 원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 문서는, 최우선으로 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희망을 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다”(로마 14,8; 필립 1,20 참조)라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구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실존 특히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주셨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생명의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인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면-이 모든 인간에게 고귀한 품위를 부여하고 인간 존중을 보증한다는 데에 우리와 생각을 같이 할 것이다.
사상적 혹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생생한 자각을 지닌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동 선언에 찬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인간의 권리는 최근 수년간 여러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선언들을 통하여 자주 천명돼 왔다. 여기서의 문제는 모든 인간이 본래 타고난 근본 권리들에 관한 것이므로, 그러한 권리의 보편가치를 부정하기 위하여 종교자유나 정치적 다양성에서 도출한 논거에 의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일이다.

 

 

. 인간 생명의 가치

 

 

인간 생명은 모든 선의 근본이고, 모든 인간 활동과 모든 사회의 필연적인 근원이고 필요조건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명을 신성한 그 무엇으로 존중하여 아무도 생명을 마음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인들은 생명 안에서 보다 위대한 그 무엇, 즉 이를 보전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부름 받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본다. 이러한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달한다.

 

1.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 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근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생명을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곳 지상에서 결실을 맺어야 할 선으로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3.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다; 인간의 편에서 취하는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에 대한 거절로 간주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살은 또한 자기 사랑의 거부이고 생존본능의 부정이며, 이웃과 여러 공동체 또는 전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책임이 경감되거나 완전히 면제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심리적인 요인들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즉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또는 형제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위험 앞에 내놓는 자기 생명의 희생(요한 15,13 참조)과 자살은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 안락사

 

 

안락사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어원으로 말하자면 고대에 안락사(euthanasia)란 말은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뜻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없애려는 어떤 의학적 개입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가끔 생명을 서둘러 폐지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결국 극도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 살해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도 있는 정신질환 및 불치병에 걸린 비정상아를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비참한 생명의 연장에서 구제하기 위한 안락 살해를 뜻하는 보다 특수한 의미로 안락사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에 사용되는 용어가 뜻하는 바를 분명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혹은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안락사의 관계 조건은 사용된 방법과 지향 의지에서 인지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고히 천명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말미암아, 극히 개인적인 혹은 기타의 이유 때문에 죽음을 요청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얻어낼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개인의 죄의식이 감소되거나 완전히 없어진다 하더라도, 비록 선의에서일지라도 양심이 저지른 판단의 오류가 결코 그러한 살인행위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행위 자체는 언제나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죽여달라고 하는 중환자들의 간청이 안락사에 대한 진정한 원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도움과 사랑을 구하는 고뇌에 찬 간원의 경우다. 의학적인 가료 외에,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부모, 자녀, 의사, 간호원 등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병자를 에워쌀 수 있고 또 감싸줘야 하는 인간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온정이 필요한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의 의미와 진통제의 사용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난 극단적인 처지에서 언제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극단적인 경우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죽음의 순간에,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고통이 될 이탈을 본능 자체가 보다 잘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많은 증거가 있고 또 그 증거들은 서로를 입증하고 있다. 오래 지속되는 질병과 고령의 노쇠 혹은 고적하고 방치돼 있는 상태가 죽음의 수용을 용이하게 하는 심리적 조건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격렬하고 오래 지속되는 고통을 동반하거나 그러한 고통이 선행되는 죽음은 자연히 사람들에게 단말마의 고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있다.

육체적 고통은 분명 회피하지 못할 인간의 조건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육체적 고통은 그 유익성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경고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에 악영향을 미쳐 흔히 고통 그 자체가 지니는 생물학적 유익성을 벗어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고통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일으킬 정도로 통렬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 특히 삶의 최후 순간에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고통은 그리스도 수난에의 동참이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치는 구원 희생에의 일치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통(마태 27,34 참조)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고통을 극히 일부라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려고 기꺼이 진통제의 사용을 절제한다고 해도 놀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웅적인 행위를 일반 규준(規準)으로 강요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겠다. 반면에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분별은 진통제가 부차적인 효과로 의식을 감퇴시키고 반의식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병자들을 위하여 고통을 제거하거나 경감시킬 수 있는 의약의 사용을 제안하고 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환자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진통제의 사용을 바라고 또 의사의 조언에 따라 진통제가 사용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습관성 현상은 그 약효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투약량의 증가를 필요하게 하므로, 과도한 진통제의 사용은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온전한 효력을 견지하고 있는 비오 12세의 답변을 상기하는 것이 적합 하겠다 : “(마취제 사용이 생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 하더라도), 종교와 윤리는 마취제를 이용한 고통과 의식의 폐지를 의사와 환자에게 허용하는가?”라는 일단의 의사들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리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그것(마취제 사용)이 여타의 종교적 윤리적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허용한다.” 물론 이러한 경우, 합리적으로 사망의 위험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결코 사망을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는 단순히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키기 위하여,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가료(加療)에 유용한 진통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불명을 야기하는 진통제는 특별한 고려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오 12세는 이렇게 경고한다: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

 

 

 

. 치료제 사용에 있어서의 적정균형

 

 

오늘날 남용될 위험을 안고 있는 기술 위주의 태도에서, 임종의 순간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 모두를 수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치료 수단의 사용은 가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여러 경우에, 상황의 복합성은 윤리적 원칙을 적용할 방도에 대하여 회의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 결국 병증(病症)의 여러 국면과 윤리적 책임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은 병자 혹은 병자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 사람 혹은 의사의 양심에 속하는 문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간호를 요구할 의무가 있다. 병자를 돌볼 임무를 지닌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간호해야 하며 필요하고 유용한 의약을 투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가능한 모든 의약을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과거에, 윤리학자들은 누구든 결코 예외적인수단을 사용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하나의 원칙으로서는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지만, 용어의 모호성과 질병 치료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좀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균형또는 불균형의 수단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어떠한 경우도, 사용될 치료법의 유형, 그 복합성과 위험의 정도, 그 사용 가능성과 비용을 검토하고, 이러한 요소들을 기대될 수 있는 결과와 비교하고, 병자의 상태와 병자의 육체적 윤리적 자력을 참작하여, 그 수단들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 원칙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추가한다.

-여타의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그러한 수단이 아직 실험단계에 있고 어떤 위험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가장 진보된 의학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수단들을, 환자의 동의 하에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 수단들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아량까지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 또한 그 결과가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환자의 동의 하에 그러한 수단들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특히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 투자가 예상되는 결과에 비해 균형을 잃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적용되는 기술이 그러한 시술에서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이해에 균형되지 않는 고통이나 도로(徒勞)를 환자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수반하는 난사(難事)일 뿐인 기용(旣用)의 기술에 의지해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그러한 거부는 자살과 같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 조건의 수용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 가료를 회피하려는 원의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망(願望)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용되는 수단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결론

 

 

동 선언에 내포된 규범들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고부된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한편,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죽음의 시간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온전한 책임과 존엄성을 지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우리 지상 실존의 종언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불멸의 생명에로 문을 연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인간 가치의 빛 안에서 이 사건에 대한 채비를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빛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병자와 임종자들에게 유효한 모든 기술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병자와 임종자들에게 끝없는 친절과 정성어린 사랑의 위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봉사는 또한 주님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아래 서명한 장관에게 허락된 알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신앙교리성성 정례회의에서 채택된 동 선언을 인준하시고 그 공표를 명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성, 198055.

 

장관 프란죠 세퍼 추기경

차관 제롬 아메르 대주교

 

(원문: S.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Declaration on Euthanasia, Vatican City 1980. 강대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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