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문헌

<교황청 신앙교리성> 교회와 세상 안에서 남녀의 협력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2004.5.31)

박정우 | 2021.07.28 14:59 | 조회 1205
차 례

들어가는 말
 I. 문제점
 II. 성서적 인간관의 근본 요소들
 III. 사회생활에서 여성적 가치의 중요성
 IV. 교회 생활에서 여성적 가치의 중요성
맺는 말


들어가는 말


1. 인간에 대한 전문가인 교회는 남자와 여자에 관련된 모든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 들어 여성의 존엄 문제와 일반 사회와 교회의 여러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와 의무에 관하여 많은 성찰이 있었다.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을 통하여1) 이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에 이바지해 온 교회는 오늘날 흔히 여성의 진정한 진보와 일치되지 않는 일부 사조들에 대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 문서는 인간 본질에 관한 현재의 일부 개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다음, 교회와 세상에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남녀의 적극적 협력의 필요성을 올바로 이해시키는 데에 근본이 되는 일부 요소들에 관한 성찰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남녀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데에 필수적인 성서의 인간관의 교리적 요소들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검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더욱 참된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함께 노력하는 선의의 모든 남녀와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하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I. 문제점


2. 최근 들어 여성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는 경향들이 등장하였다. 그 첫 번째 경향은 종속 상황을 강조함으로써 적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곧 여성이 자아를 찾으려면 스스로 남성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힘의 남용에 맞서 여성들은 힘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녀의 대립이 생기고, 상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악영향과 혼란을 가져오며, 이는 가정의 구조에 가장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두 번째 경향은 첫 번째 경향의 여파로 나타난다. 어느 한 쪽 성이 다른 쪽 성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자,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고 그러한 차이를 단순히 역사적 문화적 상황의 결과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육체적 차이의 성(sex)은 최소화되는 반면, 순전히 문화적 요소인 성(gender)만 극도로 강조되어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성의 차이나 이중성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다양한 차원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을 생물학적 결정론에서 해방시켜 여성 평등에 대한 전망을 높이고자 하는 이러한 인간론은 실제로 여러 사상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이 이론은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된 자연스러운 양친 가정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형(多形)의 성이라는 새로운 유형 안에서 동성애와 이성애를 실제적으로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3. 이러한 두 번째 경향의 직접적인 근원은 여성의 역할을 성찰하는 배경 안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더욱 깊은 동기는 생물학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 본성 그 자체에는 절대적인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곧 모든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구조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형성할 수 있고 또 형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점은, 여성 해방에는 남성 지배 문화에서 발달된 가부장적 하느님 개념을 전해 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성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굳혀 준다. 두 번째로 이러한 경향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남자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중요하지 않거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볼 것이다.
4. 이러한 사상의 흐름에 직면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빛 안에서, 바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두 성의 적극적인 협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대응의 근거와 의미, 결과를 더욱 잘 이해하려면, 인간적 지혜를 풍부히 담고 있는 성서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개입 덕분에3) 성서 안에는 이러한 대응이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II. 성서적 인간관의 근본 요소들


5. 처음으로 살펴볼 성서 본문은 창세기 처음 세 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의 ‘시작’에 눈을 돌리게 된다. 여기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 꼴’로 계시하고 있는데, 바로 이 진리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확고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4)
첫 번째 본문(창세 1,1─2,4)은 최초의 혼돈 속에서 다름을 만드신 하느님 말씀의 창조적 힘을 설명한다. 빛과 어둠, 바다와 마른 땅, 낮과 밤, 풀과 나무, 물고기와 새들이 ‘각자 자기 모습대로’ 나타났다. 질서 있는 세상은 ‘다름’에서 생겨났으며, 그러한 다름에는 상호 관계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가 창조된 배경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셨다”(창세 1,26).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들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맨 처음부터 인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뚜렷이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분명하게 선언된, 성적 차이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다.


6.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 2,4-25)는 성적 차이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확인해 준다. 아직 ‘아담’으로 통칭되는 남자는, 하느님께 창조되어 동산을 가꾸고 살면서, 동물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겪는다. 그는 자신의 배필이 될 거들 짝을 필요로 한다. 이 용어는 열등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를 일컫는다.5) 이것은 아담의 삶이 메말라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같은 ‘살’로 빚어지고, 같은 신비 안에 가려져 있는 여자만이 남자의 삶에 미래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인류를 관계적 실재로 만드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차원의 일이다. 이 만남에서 남자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놀라움을 표현한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교황 성하께서는 창세기의 이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는 공통 인간성 안에서 다른 ‘나’이다. 창조 시초부터 그들은 ‘둘의 합일체’로 나타나며 이로써 원초적인 고독, 곧 남자가 ‘그의 일을 거들 짝’(창세 2,20)을 찾지 못하는 고독이 극복된다. 이것이 단지 ‘땅을 지배하는’(창세 1,28 참조) 일을 ‘거들 짝’의 유무 문제인가?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남자가 상대를 아내로 맞아들여 그녀와 ‘한 몸’을 이루는, 인생의 동반자를 맞이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하여 남자는 ‘자기 어버이를 떠나기’(창세 2,24)까지 한다.”6)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는 친교를 지향하며 평화롭게 실천되었으며, 이는 그들의 알몸으로 표현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창세 2,25). 이렇게 하여, 남성성과 여성성의 표징을 지닌 인간의 몸은 “처음부터 혼인의 속성, 곧 인간을 선물이 되게 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선물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와 실존의 의미를 완성한다.”7) 교황 성하께서는 창세기의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시면서, “이러한 특수성을 통하여 몸은 정신을 표현하고, 창조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들과 친교를 이루며 살도록 부름 받고 있다.”8) 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혼인의 관점을 통하여, 오래된 창세기 이야기는 그 가장 깊고 근원적인 본성에서 여자는 “상대를 위하여”(1고린 11,9 참조)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준다. 소외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이 말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유사한 측면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각자 상대방을 위하여 사랑의 친교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둘의 합일체’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서로 ‘곁에서’ 또는 ‘더불어’ 살도록 부름 받을 뿐만 아니라, 상호 간에 ‘상대방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을 받는다.`…… 창세기 2장 18-25절의 본문은 혼인이 이 부르심의 첫 번째 차원이며 근본적인 차원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 사실 이외에도 인간 역사 전체가 이 부르심의 내용 속에서 전개된다. 이 역사 안에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융합이, 서로를 위한 그리고 상호 인격적인 통교를 근본적 원칙으로 삼고 인간성 자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발전되어 나간다.”9)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평화로운 모습은 첫 번째 이야기의 끝에 나오는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구절을 다시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계획과 심오한 진리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계획은 그 이후에 죄로 뒤집히고 흐려지지만, 결코 철회될 수 없다.


7. 원죄는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실천하는 방식과 그들이 창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동산을 선물로 주신 직후에, 명령 하나(창세 2,16 참조)와 금지령 하나를(창세 2,17 참조) 차례로 내리신다. 이 금지령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뱀의 꾐에 넘어가 이러한 차이를 부정한다. 그 결과,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성적 차이를 실천하는 방식도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하여, 창세기의 설명은 두 가지 차이의 인과 관계를 확립한다. 곧 인간이 하느님을 적으로 여길 때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왜곡된다. 이 관계가 손상되면, 그들이 하느님 모습에 다가가는 길 또한 손상될 위험에 놓인다.
하느님께서 최초로 죄를 지은 여자에게 하신 단호한 말씀은 이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도입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 준다.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 3,16). 이것은, 사랑이 흔히 완전한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관계, 곧 사랑을 무시하고 말살하여 사랑 대신에 한 성(性)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굴레가 되는 관계가 될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이러한 상황으로 얼룩지고 있다. 그것은 곧 요한 성인이 말한 세 가지 현세욕,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 그리고 재산을 자랑하는 것(1요한 2,16 참조)을 일깨운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본래 계획에 부합하는 남녀 관계에 요구되는 평등과 존중과 사랑은 상실된다.


8. 이러한 기본 본문들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성서의 인간관의 일부 근본 요소들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인간은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인간됨에서 동등하며, 둘 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10) 인격체로서 남녀의 동등한 존엄은 육체적, 정신적, 존재론적인 상호 보완으로 실현되며, ‘심신 일원’(uni-duality)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가 충돌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죄와, 문화 안에 새겨진 ‘죄의 구조’ 때문이다. 성서의 인간관은 공적 차원에서든 사적 차원에서든 성적 차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경쟁이나 보복이 아닌 관계적 접근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남자와 여자 안에 깊이 새겨진 실재인 성적 차이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남성과 여성을 특징지으며 각자의 표현에서 자기의 성을 나타내게 한다.”11) 성은 단순히 무의미한 생물학적 요인으로 격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격을 구성하는 하나의 기본 요소로서, 그가 존재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이와 친교하고,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적 사랑을 주고받는 양식의 하나이다.”12) 이러한 사랑의 능력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며 반영으로서, 그 사람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표현되는 육체의 혼인의 특성 안에 숨겨져 있다.
성의 인간적 차원은 신학적 차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일치 안에서 처음부터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어 있다. 이 관계는 여전히 좋으면서도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좋은 관계는 하느님께서 창조 시초부터 “좋더라.”라고 선언하신 본래의 좋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관계가 죄로 빚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질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첫 계획에 부합하지 않으며, 두 성(性) 간의 참된 관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관계는 좋은 것이지만, 상처를 입어 치유할 필요가 있다.
상처 입은 관계를 치유할 길은 무엇이겠는가? 남녀 관계의 문제점들을 단순히 죄로 얼룩진 상황의 관점에서만 고려하고 분석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오류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이다. 죄의 논리를 깨뜨려야 하며, 죄 많은 인간의 마음에서 그러한 논리를 몰아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여자’와 여자의 ‘후손’과 관련하여(창세 3,15 참조)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약속하신 일이다. 이 약속은 역사 안에서 오랜 준비를 거친 뒤에야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9. 악에 대한 승리는 일찍이 노아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의인 노아는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식구들과 다양한 종의 동물을 데리고 홍수를 피한다(창세 6`─`9장 참조). 그러나 구원에 대한 희망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선택하신 것에서 확인된다(창세 12,1 이하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하여, 선택받은 민족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과 닮아 가는 길, 곧 성덕의 길, 회개의 길을 배울 수 있도록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여러 방법 가운데에는(히브 1,1 참조), 오랜 시간에 걸친 끈기 있는 교육과 더불어 남녀 사이의 계약이라는 반복되는 주제가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비극과 이러한 비극이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구체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 이스라엘 주변의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거룩한 것과 성적인 것의 혼합을 생각한다면, 이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성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부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신랑으로 알려 주신다.
이러한 관계에서 하느님께서 “질투하는 신”(출애 20,5; 나훔 1,2 참조)으로 묘사되고 이스라엘은 “부정한” 신부 또는 “놀아난 여자”(호세 2,4-15; 에제 16,15-34 참조)로 비난받는다면, 그것은 예언자들이 확고하게 다져 준 희망, 곧 예루살렘이 완전한 신부가 되는 것을 보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씩씩한 젊은이가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으신다.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반기신다”(이사 62,5). 거짓 신들에게서 생명과 행복을 찾아 멀리 방황하다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호세 2,21)으로 다시 태어난 여자는 자신의 마음에 속삭이는 그분에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대답하리라”(호세 2,17). 그녀는 “너의 창조주께서 너의 남편이 아니시냐?”(이사 54,5)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인 남성적 모습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와 병행하여, 이스라엘이 받게 될 구원의 선물을 예표하는 초월성과 신성으로 장식한 시온의 여성적 모습을 환기하며 표현하고 있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실재이다.
아가는 이러한 형태의 계시를 사용한 중요한 계기이다. 인간 몸의 아름다움과 상호 추구의 기쁨을 찬미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의 언어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인간적인 것에 관한 언어와 가장 신적인 것에 관한 언어를 대담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교회가 자신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약의 과정에서 구원사는 남성과 여성의 참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양상을 띤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계약이라는 말은 명백히 은유적인 차원을 지니지만 단순한 은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구원의 역동성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혼인에 관련된 표현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루시는 관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관계는 인간의 혼인 경험보다 훨씬 더 광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동일하고 구체적인 조건들은 이사야의 예언에서처럼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선포하고 예표하는 일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결합시키는 식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구원은 독자들을 남자의 형상인 고난 받는 종과 여자의 형상인 시온을 지향하게 한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서 끝부분에서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위대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예언인(이사 48, 6-8 참조), 한 민족을 하루 만에 생겨나게 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비스러운 환영으로 절정에 이르기 전에(이사 66,7-14 참조), 사실 시온과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10. 이러한 모든 예표는 신약에서 완성된다. 한편으로 시온의 선택받은 딸인 마리아께서 당신의 여성성 안에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신부/이스라엘의 상황을 집약하고 거룩하게 하신다면, 다른 한편으로 성자의 남성성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상징이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곧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으로 묘사되는 사랑에 적용시킨 모든 것을 당신 인성 안에 고스란히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확인해 줄 뿐만 아니라, 이레네오 성인이 썼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새로움”이 나타났기 때문에13) 구약을 초월한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요한 복음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 잔치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칭하셨다.`─`앞으로 인류와 맺게 될 혼인의 징표로 새 포도주를 제공해 주도록 요청받으신다(요한 2,1-12 참조). 이러한 구세주의 혼인은, 또다시 ‘여인’이라 불리신 어머니가 계신 가운데 새 계약의 피/포도주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열린 심장에서 쏟아져 나올 때,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다(요한 19,25-27.34 참조).14)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을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고 신랑이 오시면 그의 뒤에 가려져야 하는 “신랑의 친구”라고 묘사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15)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생활을 혼인의 신비로 봄으로써 구원이 지닌 혼인의 의미를 온전히 발전시킨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시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2고린 11,2)라고 쓰고 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배우자 관계를 다시 다루면서 그 의미를 심화시킨다. 신약에서 사랑받는 신부는 교회이며, 이를 교황 성하께서는 「가정 교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이 신부는,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대로, 세례 받은 사람 각자 안에 현존하며, 마치 신랑 앞에 나서는 신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페 5,25-27).”16)
세상 창조 때에 묘사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창세 2,24 참조) 성찰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이를 “참으로 심오한 신비”라고 감탄하며,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본다.”(에페 5,32)라고 선포한다. 세례 생활의 힘으로 실천되는 남녀의 사랑은 이제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사랑의 성사가 되며, 정절과 일치의 신비를 증언한다. 그러한 신비에서 ‘새로운 하와’인 교회가 태어나고 그 신비를 통하여 교회는 영원한 혼인의 완성을 향하여 지상을 순례하는 삶을 산다.


11. 파스카 신비 속에 젖어들어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생생한 사랑의 표지가 된 그리스도인 부부는 새로워진 마음으로 그들 관계에서 욕정의 요소들을 피하고, 또 죄로 생겨난 하느님과의 단절로 인류 최초의 부부의 삶에 도입된 예속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는, 상처 입은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갈망해 온 사랑의 선함이 새로운 가능성을 지니고 새롭게 강조되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자(마태 19,3-9 참조), 바로 이러한 사랑의 선함에 비추어, 하느님께서 맨 처음에, 곧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이혼을 정당화시킨 죄가 나타나기 이전에 바라셨던 남자와 여자 사이의 계약이 요구하는 것들을 상기시키신다.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규율과는 거리가 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사실 죄보다 더 강한 절개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포이다. 부활의 힘은 절개가 우유부단함, 상처, 부부의 죄를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부부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죄에서 벗어나 서로를 내어 주는 기쁨을 알 수 있게 된다.


12. 바오로 성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3,27-28)라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에서 남녀 사이의 차이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남녀의 차이를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남녀 관계를 왜곡하는 적대 관계, 대립, 폭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될 수 있고 또한 극복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녀의 차이가 그 어느 때보다 재확인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성서의 맨 마지막까지 성서의 계시 안에 존재한다. 요한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말하면서, 역사의 마지막 시간에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린”(묵시 21,2) 예루살렘의 모습을 제시한다. 요한 묵시록은 신랑이 오시기를 간청하는 신부와 성령의 말로 끝맺고 있다.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피조물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명백히 변화된 모습으로 현재를 초월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비록 성의 표현이 일시적이고 세속적이며 순간적이고, 출산과 죽음으로 표시되는 삶의 단계를 지향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실 줄 모르는 사랑”(1고린 13,8 참조)을 특징으로 삼는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 생활은 남녀의 이러한 미래의 삶의 형태에 대한 예언이 되고자 한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독신 생활은 남자와 여자의 실재로 남아 있으면서도 더 이상 현재의 혼인 관계의 제약에 종속되지 않는 삶의 실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마태 22,30 참조). 혼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독신 생활은 하느님과 마주 봄으로써 완전하게 될 그들의 관계를 상기시켜 주고 예언해 준다.
처음 창조되는 순간부터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그러한 차이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그들의 차이를, 부정하거나 근절함으로써 극복해야 할 불화의 원인으로 보지 않고, 상호 존중함으로써 발전시켜 나가야 할 협력의 가능성으로 본다. 바로 여기에서, 여성의 존엄과 인류 사회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III. 사회생활에서 여성적 가치의 중요성


13. 여성의 실제 삶에 관련된 근본 가치들 가운데에는 ‘다른 이를 위한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일부 페미니즘 수사법은 ‘우리를 위한’ 이라는 요구를 내세우지만,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최고의 미덕은 생명을 이끌어 내고 다른 사람의 성장과 보호에 이바지하는 행위라는 것을 깊이 통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여성의 육체적 출산 능력과 연관된다. 이러한 능력이 실천되든 잠재적으로만 남아 있든, 그것은 여성의 인격을 깊이 구성하는 실재이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여성은 매우 빨리 성숙하며 생명의 중요성과 생명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여성 안에서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의식과 존중이 성장하며, 이는 개인과 사회의 실존에 흔히는 치명적인 추상적인 것과 반대된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증언하듯,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역경을 이길 수 있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명을 유지시키며 끈질기게 미래를 내다보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 생명의 가치를 눈물로 기억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은 결국 여성이다.
모성애는 여성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는 여성을 육체적 출산의 관점에서만 고려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영역에서, 순전히 양적인 관점에서만 생물학적 생산성을 치켜세우는 심각한 왜곡이 있을 수 있으며, 여기에는 흔히 여성에 대한 위험한 수준의 경멸도 뒤따른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전통이나 다른 여러 사회의 요구와 관련해 볼 때, 동정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소명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17) 동정성은 여성을 단순히 생물학적 운명 안에만 가두어 두려는 모든 시도를 반박한다. 동정성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내어 주는 것만이 그리스도교의 소명이라는 통찰을 육체적 모성에서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모성은 동정성에서 근본적으로 영적인 차원, 곧 다른 사람을 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육체적 생명을 주는 것에만 만족하는 데 있지 않다는 통찰을 얻는다. 이는 육체적 출산이 없더라도 모성애는 여러 형태로 충만히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18)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관계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포함하여 가정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남성이 대신할 수 없는 여성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여성의 타고난 역량”19)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원초적 사회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주권 사회인”20) 가정 안에서 의미 있고 적극적으로 현존하여야 함을 뜻한다. 가정은 한 민족의 특징이 형성되며 그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가르침을 얻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건 없이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들이 존중받는 만큼 다른 이들을 존중하도록 배우며, 자신들에게 온전한 관심을 베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처음 발견하는 만큼 하느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경험이 없을 때, 사회 전체는 폭력에 시달리며 다시 더 많은 폭력을 낳게 된다. 이는 또한 여성들이 직업 세계와 사회 조직에 참여하고, 국가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경제와 사회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해결책을 장려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정과 일이라는 이 두 가지 활동의 상호 관계는 여성들의 경우에 남성들의 경우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 조직과 노동 법규를 가정 안에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임무와 조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과제이다. 이는 법적, 경제적, 조직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고방식과 문화, 존중의 문제이다. 사실 가정 안에서 여성이 하는 일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여성은 자기가 바란다면 사회의 비난을 받거나 경제적 곤란을 겪지 않고도 가사에만 온전히 매달릴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일에 종사하고 싶은 여성들은 적절한 업무 일정에 맞추어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성들은 가정생활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균형은 물론 가정의 화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를 계속해서 참아 내느냐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어머니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지 않으며, 또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여 아무런 열등의식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녀들의 나이에 따른 다양한 요구에 맞추어 자녀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데에 헌신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그 사회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21)


14.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인간적 가치임을 상기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의 인간 조건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들이 그러한 가치들을 상기시키고 탁월하게 드러내는 것은 단지 여성들이 그러한 가치들에 더욱 직접적으로 자신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속성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사실 상대를 위하여, 상대 때문에 살 수 있는 인간의 근본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회 안에서 여성의 발전은 여성 덕분에 재발견되는 그러한 가치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인간화로 이해하고 이를 추구하여야 한다. 두 성(性) 간의 갈등으로 제시되는 모든 시각은 착각일 뿐이며 위험한 것이다. 이는 결국 남자와 여자의 분리와 경쟁으로 끝날 것이며, 그릇된 개념의 자유로 조장되는 유아론(唯我論)을 촉진할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의 권리 증진을 침해하지 않으며, 남성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보는 관점을 수정하고자 한다. 올바른 남녀 관계의 조건은 불신과 방어적인 대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녀 관계는 함께 나누는 사랑의 행복과 평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더욱 구체적인 차원에서, 교육과 노동, 가정, 공공 서비스 이용, 시민 참여 영역에서 사회 정책들을 통하여 모든 부당한 성 차별을 철폐하여야 하고,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의 열망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요구를 확인하여야 한다. 동등한 존엄과 공통된 인간 가치의 옹호와 증진은,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의 인성 실현에 관계될 때, 남자와 여자의 차이와 상호 관계를 세심하게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IV. 교회 생활에서 여성적 가치의 중요성


15. 교회 안에서 여성의 ‘표징’은 그 어느 때보다 중심적이고 풍요롭다. 이는 교회가 하느님에게서 받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정체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맡은 각자의 역할을 생각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깊고 본질적인 ‘신비로운’ 정체성이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겨났고 혼인의 체험으로 탁월하게 표현되는 사랑의 관계에 따라 그리스도와 결합된 공동체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교회의 첫 번째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무르고, 그 사랑을 관상하며 찬미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모습은 교회의 근본적인 준거가 된다. 성모님께서는 교회 앞에 놓인 거울이시며, 교회는 그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하느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마음가짐과 태도, 행동을 인식하도록 권유받는다고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성모님의 존재는 교회가 자기 존재의 뿌리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데에 두라는 초대이다. 신앙은 인간 쪽에서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간이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다.”(창세 18,14; 루가 1,37 참조)고 믿는 이러한 신앙은 교회가 아버지께 겸손과 사랑의 순종으로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말씀드릴 때 실천되며 더욱 깊어진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성모님의 말씀처럼, 신앙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십자가 아래까지도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이다. 어둠의 시기에도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확고히 신뢰하며 용감하게 신앙을 지키신다.
교회는 언제나 바로 성모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친밀성을 배운다. 베들레헴의 작은 아기를 팔에 안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겸손을 깨닫도록 가르치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상한 몸을 받아 안으신 성모님께서는 교회에 폭력과 죄로 상처받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 주신다. 성모님에게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의 삶을 통하여 드러내 보여 주신 사랑의 힘의 의미를 배운다. “주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루가 1,51-52). 성모님에게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하신 일들을 찬미하는 기쁨과 의미를 배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49). 그들은 그 ‘큰일’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깨어 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16. 그러나 성모님을 바라보고 본받는 것은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성의 개념에 따른 수동적인 태도를 채택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지배와 권력을 최고로 꼽는 이 세상에서 교회를 취약하게 만들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길은 세상이 이해하는 지배의 길도(필립 2,6 참조), 권력의 길도(요한 18,36 참조)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수동성’은 실제로 사랑의 길이라는 것을 하느님의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것은 모든 폭력을 물리치는 왕권이며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고 인류를 재창조하는 ‘수난’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면서 당신 교회가 성모님에게서 사랑이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도록 권고하신다.
경청과 환대, 겸손과 충실, 찬미와 기다림의 자세를 지니신 성모님을 준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진 여성성의 모형에 근거한 정체성을 교회에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를 이스라엘의 영적 역사와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태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소가 된다. 어떠한 조건이나 생활 신분에 있든, 공적 책임이 따르는 성소이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태도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적인 측면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의 특징이 되어야 하지만, 사실 여성들은 특별한 집중력과 자연스러움으로 이러한 태도들을 실천한다. 이렇게 하여, 여성들은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믿는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 주는 데에 특별하게 이바지함으로써 교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제 서품이 남성에게만 유보되어 있다고 해도22) 여성들이 그리스도교 생활의 핵심에 접근하는 데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부가 신랑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법을 보여 주는 독특한 모범이며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맺는 말


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묵시 21,5 참조). 그러나 마음의 회개 없이는 은총으로 새로워질 수 없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닦아 놓으신, 죄를 이긴 사랑의 길을 알아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남자가 여자와 맺는 관계는 변화되며, 요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세 가지 현세욕은(1요한 2,16 참조) 세력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여성들의 삶의 증언은, 인류가 자만과 권력욕, 폭력의 비극에 빠지지 않게 하는 가치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높이 존중받고 평가되어야 한다. 여성들 또한 회개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여성성 안에 간직되어 있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과 특별한 가치들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 두 경우 모두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회개함으로써 남자와 여자 모두 하느님을 그들의 ‘조력자’, 사랑이 가득하신 창조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요한 3,16) 구세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과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겸손하게 간청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특별히,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여인,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루가 1,42 참조)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보여 주도록 선택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이것을 간청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모든 남자와 여자 안에 새겨져 있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각자가 받은 특별한 은총에 따라 드러난다(창세 1,27 참조). 그럼으로써만,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기쁨을 찬양하고 있는 아가의 노래에서 증언하듯, 평화와 경이의 길을 재발견할 수 있다.
교회는 죄가 개인과 사회 안에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는 때때로 우리에게 혼인한 부부가 누릴 수 있는 선익을 거의 단념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교회는 어떤 상처나 불의에도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는 힘의 위력을 더욱 잘 알고 있다. 교회가 오늘날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평화와 경이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1요한 4,8.16)는 계시로써 이 세상과 그 역사에 빛을 비추어 준 부활 동산의 평화와 경이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아래에 서명한 추기경 장관에게 허락한 알현에서, 신앙교리성 정기 총회에서 채택된 이 서한을 승인하시고 그 발표를 명령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 사무실에서
2004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차관 안젤로 아마토 실라 명의 대주교
 
<원문 Letter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on the Collaboration of Men and Women in the Church and in the World, Libreria Editrice Vaticana, Vatican City 2004>
 
1. 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1981.11.22., 『사도좌 관보』(AAS) 74(1982), 81-192면; 교황 교서 「여성의 존엄」(Mulieris Dignitatem), 1988.8.15., AAS 80(1988), 1653-1729면; 「가정 교서」(Gratissimam Sane), 1994.2.2., AAS 86(1994), 868-925면; 「여성들에게 보내는 교서」, 1995.6.29., AAS 87(1995), 803-812면; Catechesi Sull’amore Umano(1979-1984), Insegnamenti II(1979)`-`VII(1984); The Theology of the Body, 영어판, Boston: Pauline Books Media, 1997; 교황청 가톨릭교육성, 「인간적 사랑에 관한 교육 지침」, 1983.11.1.; 교황청 가정평의회, 「인간의 성(性) 그 참모습과 참뜻」, 1995.12.8.
2. 성(gender)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서는, 교황청 가정평의회의 「가정, 혼인, 사실혼」, 2000.7.26., 8항을 참조하라.
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9.14., 21항, AAS 91(1999), 22면. “계시를 통해서 그(성서의 인간)에게 다가온 신비에 대한 이 개방은 그에게는 결국 지혜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이성이 그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열쇠인 것입니다.”
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여성의 존엄」, 6항, AAS 80(1988), 1662면;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5, 6, 1; 5, 16, 2-3, 『그리스도교 원전』(SC) 153, 72-81; 216-221;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De Hominis Opificio, 16, 『그리스 교부 총서』(PG) 44, 180; 「아가 강론」(In Canticum Homilia), 2, PG 44, 805-808;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Enarratio in Psalmum), 4, 8,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CL) 38, 17.
5. 거들 짝(helpmate)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낱말 ezer는 오로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도 때때로 인간을 도와주시는 분(ezer)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출애 18,4; 시편 9,35[10,14] 참조), 이 말이 열등이나 착취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여성의 존엄」, 6항, AAS 80(1988), 1664면.
7.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1980.1.16., The Theology of the Body, Boston: Pauline Books Media, 1997, 63면에 재수록.
8.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 1980.7.23., 같은 곳, 125면에 재수록.
9. 「여성의 존엄」, 7항, AAS 80(1988), 1666면.
10. 「여성의 존엄」, 6항, AAS 80(1988), 1663면.
11. 교황청 가톨릭교육성, 「인간적 사랑에 관한 교육 지침」, 1983.11.1., 5항.
12. 같은 곳, 4항.
13. 「이단 반론」, 4, 34, 1, SC 100, 846: “Omnem novitatem attulit semetipsum afferens”.
14. 고대의 해석 전통은 가나의 성모님을 “figura Synagogae”(교회의 표상) 또는 “inchoatio Ecclesiae”(교회의 시원)으로 본다.
15. 여기서 제4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에서도 발견되는 요소(마태 9,15와 다른 복음서에서 이에 해당되는 부분 참조)를 더욱 깊이 있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정 교서」, 1994.2.2., 18항, AAS 86(1994), 906-910면도 참조하라.
16. 「가정 교서」, 19항, AAS 86(1994), 911면. 「여성의 존엄」, 23-25, AAS 80(1988), 1708-1715면도 참조.
17. 「가정 공동체」, 16항, AAS 74(1982), 98-99면 참조.
18. 「가정 공동체」, 41항, AAS 74(1982), 132-133면; 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생명의 선물」(Donum Vitae), 1987.2.22., II, 8, AAS 80(1988), 96-97면 참조.
19. 요한 바오로 2세, 「여성들에게 보내는 교서」, 1995.6.29., 9-10항, AAS 87(1995), 809-810면 참조.
20. 「가정 교서」, 17항, AAS 86(1994), 906면.
2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1.9.14., 19항, AAS 73(1981), 627면.
22. 요한 바오로 2세,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한 교황 교서 「사제 서품」(Ordinatio Sacerdotalis), 1994.5.22., AAS 86(1994), 545-548면; 교황청 신앙교리성, 교황 교서 「사제 서품」(Ordinatio Sacerdotalis)의 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 1995.10.28., AAS 87(1995), 111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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