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문헌

인간 복제에 관한 성찰-교회문헌

관리자 | 2008.12.15 22:52 | 조회 2949






인간 복제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HUMAN CLONING






교황청
생명학술원






   
1.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진보하고 분자생물학, 유전학, 인공
수정법 등이 발전함에 따라, 이미 오래 전에 동식물의 복제 실험과 성공적인 복제가 가능해졌다. 1930년대 이후로, 인위적인
쌍둥이 분할 방법을 써서 똑같은 개체들을 만들어 내는 실험을 해 왔는데, 이러한 방법을 부적절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복제라 할
수 있다. 축산 분야에서는 선택된 표본을 대량 생산하려는 의도로, 이러한 쌍둥이 분할을 실험용 축사에서 널리 행해 왔다. 1993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제리 홀과 로버트 스틸만은 2, 4, 8 난할기의 인간 배아에 대하여 실시하였던 쌍둥이 분할 실험 관련
자료를 발표하였다. 이 실험은 해당 윤리위원회의 사전 승낙을 받지 않은 채 이루어졌는데, 당사자들에 따르면, 자신들이 실험 결과를
발표한 것은 윤리적 논쟁을 가열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에 발표된 기사는 여론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아이언 빌머트와 K.H.S. 캠벨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에딘버러 소재 로슬린 연구소 팀의
노력으로 ‘돌리’라는 복제 양이 탄생하였다는 기사였다. 이 때문에 여러 위원회와 국내외 당국들은 성명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새롭고도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는 두 가지 새로운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분할의 문제가 아니라, 복제라고
정의되는 급진적인 기술 혁신의 문제라는 점이다. 곧, 그것은 핵의 유전 형질을 제공하는 성체(成體)와 생물학적으로 똑같은 개체들을
만들어 내는 무성(無性), 무배우자 생식이라는 문제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형태의 정확하고 완전한 복제가 지금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는 점이다. 곧, 동물의 일생에서 이미 분화하여 성장해 버린 단계의 체세포 DNA는 분화의 형태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 본래의 분화력을 회복할 수 없고, 따라서 새로운 개체를 발생시킬 능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극복함으로써, 이제 인간 복제에 새로운 길이 열린 것처럼 보인다. 인간 복제란
체세포상으로 제공자와 똑같은 개체를 하나 이상 복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은 당연히 우려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초기에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던 시기가
지나자, 일부에서는 진보를 나쁜 것으로 보는 대신, 연구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주목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심지어 언젠가는
가톨릭 교회도 복제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견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므로, 시끄러운 사건으로 주목받았던 그 일을 좀더 거리를 두고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2. 생물학적 사실




   
인공 생식의 한 형태라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볼 때, 복제는 두 배우자의 기여 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성 생식이면서 무배우자 생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제하고자 하는 개체의 체세포에서 추출한 세포핵이나 체세포 자체를 세포핵이 제거된 난세포, 다시 말해 모계 게놈(염색체의
한 조, genome)이 없는 난세포와 “융합”시킴으로써 이른바 수정을 대체한다. 체세포의 세포핵은 유전 형질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얻어지는 개체는 변이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핵 제공자와 똑같은 유전자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핵 제공자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일치하기 때문에, 새 개체에서 핵 제공자의 체세포 복제나 복사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에딘버러의 결과는 난세포와 핵 제공자의 세포핵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277회에 걸쳐 시도한 끝에
나왔다. 곧, 277개 가운데 여덟 개만이 성공하여 배아(胚芽)로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 오직 한 개의 배아만이 양으로
태어나기에 이르러, 그 양을 ‘돌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실험에서 아직 많은 점이 여러 가지 의구심과 의문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실험된 277개의
제공 세포들 가운데 “미분화 세포들”, 곧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게놈을 가진 세포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가능성과, 모계의 난자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담당할 수 있었던 역할, 그밖에 유감스럽게도 연구자들이 제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다른 여러 가지 의문이 있다. 그럼에도 그 실험 결과는 지금까지 언제나 두 배우자를 이용하여 이루어져 왔던 인공 수정의 방식들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돌연변이의 가능성은 별 문제로 치고 ─ 그 가능성은 많이 있을 수 있다 ─ 복제로 얻어진 개체는
성장하면서 DNA 제공자와 아주 비슷한 체구조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 마땅히 강조될 것이다. 이 점이 특히 인간에게 그 실험을
적용할 때 가장 우려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확대 적용할 때에도, 이러한 체구조의 복제가 반드시 존재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정신과 영혼은 인간에게 속한 모든 실체
가운데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모가 만들어 내는 것도, 인공 수정이나 복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심리적인 발달과 문화와 환경은 언제나 별개의 인격을 만들어 낸다. 쌍둥이인 경우에서도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곧 닮았다는 것이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복제에 수반되는 무한한 능력에 대한 대중의
기대나 미묘한 분위기는 적어도 올바른 시각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 복제가 인격의 근원인 정신을 포함할 수 없음에도, 인간 복제에 대한 생각은 무한한 능력을
갈구하면서 이미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상황들을 상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곧, 비범한 재능과 미를 지닌 사람들을 복제하기,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재생하기, 유전병들에 면역성이 있는 건강한 사람들을 고르기, 인간의 성(性)을 선택하기, 선별된
냉동 배아들을 생산하고, 그것을 나중에 자궁에 이식시켜 여분의 장기들을 제공하는 데 사용하기 등이다.

    마치 공상 과학과도 같은 이러한 가정적인 상황들과 관련하여, 복제가 “합당”하거나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제안들이 뒤이어 나올 수 있다. 곧, 남편이 무정자증으로 고민하는 가정에 아기를 낳게 해 준다거나, 과부가 된 여자에게
죽어 가는 자식을 대신할 아기를 낳게 해 주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전혀 터무니없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제 기술을 적용한다고 예상할 때, 이러한 통탄스러운 행위에 대한 인간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3. 인간 복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윤리 문제




    인간 복제는 우생학적 계획에 속하므로, 그것을 조목조목 비난해 온 모든 윤리적·법률적 견해의
영향을 받기 쉽다. 한스 요나스가 이미 썼듯이, 인간 복제는 “방법상으로는 가장 냉혹하고 목적상으로는 가장 비열한 유전자 조작의
형태이다. 그것의 목표는 유전 형질을 임의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지배적인 방법과는 달리 유전 형질을 임의로 균일하게
고정시키는 것이다”(한스 요나스, Cloniamo un uomo: dall’eugenetica all’in-gegneria genetica:
Tecnica, medicina ed etica, Einaudi, Turin, 1997, 122-154. 136면 참조).

    인간 복제는 생물학적인 측면이나 엄밀히 인격적인 측면에서 인간 생식의 기원에 있는 구조적인
상관성과 상호 보완성을 근본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양성교(兩性交)를 기능의 측면에서 완전히 쓸모 없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복제 배아(clone-embryo)를 만들기 위해 핵이 제거된 난자가 사용되어야 하며, 새로운 핵을 갖게 된 난자가 끝까지
발생하려면 당분간 여성의 자궁이 필요하다. 축산학에서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실험 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간 생식의 고유한 의미를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산업 생산의 논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곧, 시장 조사를 벌이고 장려하며, 실험을
개선하여 늘 새로운 모델을 생산하여야 하는 논리이다.

    여성들은 철저히 이용되어 순전히 생물학적인 몇 가지 기능(난자와 자궁을 제공하는 것)만 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 더구나 실험실에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마지막 단계로서, 인공 자궁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연구에서
엿볼 수 있다.

    복제 과정에서는 친자 관계, 친족 관계, 혈족 관계, 어버이 관계 등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들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 여성이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어도 자기 어머니의 쌍둥이 자매가 될 수 있고, 자기 할머니의 딸이 될
수도 있다. ‘시험관’ 수정으로 이미 혈통의 혼란이 일어났지만, 복제는 이러한 결합의 근본적인 파괴를 뜻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행위에서처럼, 인간 복제도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흉내내고” “모방”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구성 요소를 어떻게 초월하는지를 무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진화가
덜 된 개체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생식 형태로 축소된다.

    인간 복제는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고 그들의 생물학적 본질을
마음대로 또는 순전히 실리적인 기준에 따라 선별하여 계획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조장한다. 여기에서 생물학적 본질은
정신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인격적 본질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적 본질의 한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인간을 선별한다는 이러한 개념은 수적으로 한계가 있는 복제 행위를 넘어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예기하지
못한 문화의 부산물을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가치가 그들의 인격적 본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평가를
받아 선별될 수 있는 생물학적 특질에 달려 있다는 확신이 점점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복제는 복제된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도 비판받아야 한다. 복제 인간은 다른 존재에게서
“복사”(생물학적인 복사일 뿐이라 하더라도)됨으로써 세상에 등장한다. 이러한 행위는 복제 인간에게 근본적인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 그의 정신적 신원은 그 현실로써, 또 나아가 단순히 그의 “또 다른” 실질적 존재만으로도 위협받기 때문이다. 복제 인간의
신원을 감추려는 모의(謀議)가 효과를 거두리라고 볼 수도 없다. 요나스가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러한 모의는 불가능할뿐더러 비도덕적이다.
“복제 인간”은 복제할 “가치가 있는” 누군가와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그는 기대와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주목이 그의 인격적 주체성에 진정 타격이 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지적한 결과들 가운데 적어도 얼마만이라도 피하고자 애쓰면서 인간 복제 계획을
자궁에 이식하기 “전(前)”까지의 시점에서 중단하겠다고 하는 생각도 도덕적 관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복제된 아기의 출생은 막고자 하면서도 배아와 태아의 복제는 여전히 허용하는 복제 금지령은 결국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을 허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없애 버려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잔인하고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그러한 실험은 비도덕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여러 부품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계로 명백히 여기고) 단순한 연구 도구로서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인간 개인의 존엄과 인격적
본질을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게다가 복제 실험에 쓸 난자를 얻고자 여성을 이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복제 인간의 경우에서도 그것이 비도덕적인 까닭은 배아 단계라도 그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관 수정, 단순히 실험 목적으로
행해지는 시험관 수정까지도 철저히 단죄하는 모든 도덕적 이유가 인간 복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 복제” 계획은 가치 기준이
없는 과학이 이르게 된 끔찍한 탈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그것은 삶과 구원의 의미에 대한 대용물로서 과학과 기술과 “삶의
질”에 의존하는 우리 문명의 깊은 병적 증상을 보여 주는 표징이기도 하다.

   
“초인”에 대한 헛된 희망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행위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명백한 결과를 낳는다.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지위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고양시키기는커녕,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예속과 차별, 심각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제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하신 힘을 비극적으로 서투르게 모방하려는 위험한 시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와 지성을 주시면서, 창조된 세계를
맡기셨다. 인간은 단지 실천에 옮기지 말라는 요구만 받을 뿐 행동에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인간은 선과 악을 식별함으로써
스스로 이러한 제약을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다시 한번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과학 기술을 해방의 도구로 변화시키느냐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고통을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의 노예가 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결정에 달려 있다.

    생명을 사랑의 선물로 보는 개념과 인간을 산업적 생산품으로 보는 관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명확히 하여야 한다.

    인간 복제 계획을 중단시켜야 할 도덕적 의무는 또한 문화적·사회적·법률적 협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학 연구의 진보가 오늘날 옛 이데올로기들을 대체하는 듯이 보이는 과학 독재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체제에서, 각 개인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 지적·육체적 능력의 유무에 상관 없이 삶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조건없이 존중될 때 보장되는 것이다. 인간을 언제 어디서나 단순한 수단과 대상이 아니라 목적과 가치로 대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인간 복제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4. 인권과 연구의 자유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복제는 모든 인간 권리의 바탕이 되는 두 가지 기본 원칙에 위배됨을
보여 준다. 곧,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는 원칙이다.

    언뜻 보기와는 달리, 모든 인간이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원칙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침해받게 되며, 복제 논리에 내재되어 있는 완전한 우생학적 선택 차원 때문에 차별이 생기게 된다. 유럽 의회의 결의문(1997년
3월 12일)은 이러한 두 가지 원칙에 대한 침해를 명확히 언급하면서, 인간 복제 금지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1983년 이후로, 유럽 의회와, 인공 출산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모든 법, 심지어 가장 관대한 법까지도 언제나
인간 복제를 금지하여 왔다. 교회 교도권은 1987년 훈령 「생명의 선물」(Donum Vitae)에서 인간 복제, 쌍둥이 분할,
단성 생식의 가능성을 비난해 왔다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가능하여진 인간 복제가 비인간적인 근본 이유는, 시험관 수정 등과
같이 법적으로 인정된 다른 형태와 비교해서 인간 복제가 극단적인 인공 출산 형태이기 때문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인간 복제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복제를 당한 사람의 존엄과
인간 생식의 존엄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절실한 문제는, 과학 탐구에 대한 요구와 반드시 존중하여야 할 인간 가치의 조화를
재확립하는 일일 것이다. 과학자는 인간 복제를 도덕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굴욕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러한 금지는
연구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연구의 창조성이 변질되지 않게 한다. 과학 연구의 존엄성은 그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가장 부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있다.

    나아가, 동식물 세계에는 복제를 포함하여 연구할 여지가 많이 있다. 동물 자체를 보호하는 규정과
종(種)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존중할 의무를 지키기만 한다면, 그러한 연구는 인간이나 다른 생물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되거나
커다란 유익이 된다.

    과학 연구가 인간에게 유익을 주면서, 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 주며, 영양 실조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구 자원을 더 잘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인류의 희망을 대변해 준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은
과학자들의 재능과 노력에 맡겨져 있다.

    생의학이 인간과 사회의 참된 행복과 맺고 있는 관계를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려면, 교황 성하께서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에서 상기시키시듯이, 인간과 세계를 하느님의 창조물로 보면서, 과학이 인간과
사회의 선익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을 길러 나가야 한다.

   
“이것은 생명을 그 깊은 의미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며, 그 절대적인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그것이 자유와 책임으로 초대하는 것임을 파악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것은 생명을, 소유하는 대상인 어떤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선물이라고, 모든 사물 안에서 창조주를 닮은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모든 사람 안에서 그분의 살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생명의
복음」, 8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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